시로 여는 일상 1052

우명牛鳴/ 유홍준

우명牛鳴 / 유홍준 진주시 망경동 섭천에 들어와 산 지 삼년 되었어요 섭천은 형평(衡平), 형평(衡平), 백정들이 살던 마을이에요 소 를 잡던 사람들이 소를 잡던 손을 씻고 피를 씻고 쌀을 씻고 꽃을 심고 살던 마을이에요 오려고 온 게 아니에요 내가 사는 아파트는 진주에서 가장 싼 아파트, 동신아파트가 아니라 등신아파트죠 길을 잃은 소는 밤이 되면 무서워, 무덤으로 간대요 길 잃은 소가 무덤을 찾듯이 나도 이곳엘 찾아 왔어요 소를 잡던 이 마을에서 나는 온갖 두려움으로 눈망울을 디 롱거리며 되새김질 되새김질 끊임없이 천엽이 생겼어요 당신에게로 가고 싶은 내 무릎뼈는 우슬 이에요 자귀나무에 매어놓은 소는 묶인 자리에서 얼마나 뱅글뱅 글 돌고 또 돌았던지 자귀나무는 형편없이 망가진 나무가 되 었어요 울고 싶..

유홍준 하얀 면장갑

하얀 면장갑/ 유홍준 저것을 끼고 나는 운구를 했다 무겁지가 않았다 가볍지가 않았다 아직은 사람인 사람을 들고 갔던 기억 어떤 꽃보다도 희고 어떤 꽃보다도 감촉이 좋았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검은 줄이 그려진 완장을 차고, 무표정 한 얼굴로 나는 주검을 옮겼다 주검을 옮긴 면장갑을 버리지 않고 집으로 가져왔다 하얀 것에 대해서 나는 설명 할 수가 없다 그냥 간직할 뿐이 다 그냥 들여다 볼 뿐이다 진주 시립화장장에서 나도 하얀 것이 될 때까지 * * * 사실 삶과 죽음은 한치 발끝에 달렸기고 하고 손바닥과 손등의 거리이기도 해서 'Well-bing'만큼 ' Well-dying' 도 중요한 삶의 철학입니다 작가들은 현상(현실) 이면까지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라 죽음에 대한 고찰을 일상적으로 하는 훈련이 된..

묵편墨篇. 7/ 박기섭

묵편墨篇. 7 박기섭 -닭 게으른 신의 뜰에 봄은 더디 오고 서너마리 다소곳이 햇볕 속에 흩어졌다 꽃도곤 벼슬이 붉은 닭 천상의 양식을 쪼는 -비, 오월 영상 팔,구도쯤의 오월도 아침나절 이맛전을 스쳐가는 짧은 비의 탄주를 나무는 다 들은 눈치다 사운거리는 잎들을 보면 -풍경 처마끝을 들어 올린 춤도 이제 지쳤구나 숱한 천둥번개 스러져간 골짜구니 쇳소리 떨어진 족족 산구절초 피었다

여름 능소화/ 정끝별

여름 능소화/ 정끝별 꽃의 눈이 감기는 것과 꽃의 손이 덩굴지는 것과 꽃의 입이 다급히 열리는 것과 꽃의 허리가 한껏 휘어지는 것이 벼랑이 벼랑 끝에 발을 묻듯 허공이 허공의 가슴에 달라붙듯 벼랑에서 벼랑을 허공에서 허공을 돌파하며 홍수가 휩쓸고 간 뒤에도 붉은 목젖을 돋우며 더운 살꽃을 피워내며 오뉴월 불든 사랑을 저리 천연스레 완성하고 있다니! 꽃의 살갗이 바람 드는 것과 꽃의 마음이 붉게 멍드는 것과 꽃의 목울대에 비린내가 차오르는 것과 꽃의 온몸이 저리 환히 당겨지는 것까지

마음에 없는 말을 찾으려고 허리까지 다녀왔다/ 이원하

마음에 없는 말을 찾으려고 허리까지 다녀왔다/ 이원하 하늘에 다녀왔는데 하늘은 하늘에서도 하늘이었어요 마음 속에 손을 넣었는데 아무 말도 잡히지 않았어요 먼지도 없었어요 마음이 두개이고 그것이 짝짝이라면 좋겠어요 그중 덜 상한 마음을 고르게요 덜 상한 걸 고르면 덜 속상할테니깐요 잠깐 어디 좀 다녀 올게요 가로등 불빛을 좀 밟다가 왔어요 불빛 아래서 마음에 없는 말을 찾으려고 허리까지 뒤졌는데 단어는 없고 문장은 없고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삶만 있었어요 한 삼 개월 실눈만 뜨고 살테니 보여주지 못하는 이것 그가 채갔으면 좋겠어요 * * * 신춘문예 등단 작품 ' 제주에서 홀로 살고 술은 약해요' 제목부터 기존 시에서 보기 어려운 상큼 발랄, 통통 튀면서 '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 다더니 살..

적/ 임화

적 / 임화 - 네 만일 너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이는 사랑이 아니니라. 너의 적을 사랑하고 너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라. 『복음서』 1 너희들의 적을 사랑하라 ─ 나는 이때 예수교도임을 자랑한다. 적이 나를 죽도록 미워했을 때, 나는 적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미움을 배웠다. 적이 내 벗을 죽음으로써 괴롭혔을 때, 나는 우정을 적에 대한 잔인으로 고치었다. 적이 드디어 내 멋의 한 사람을 죽였을 때, 너는 복수의 비싼 진리를 배웠다. 적이 우리들의 모두를 노리었을 때, 나는 곧 섬멸의 수학을 배웠다. 적이여 너는 내 최대의 교사, 사랑스러운 것! 너의 이름은 나의 적이다. 2 때로 내가 이 수학 공부에 게을렀을 때, 적이여! 너는 칼날을 가지고 나에게 근면을 가르치었다. 때로 내가 무모한 돌격을 시..

當代의 當代의 / 최승자

當代의 當代의/ 최승자 내가 믿지 않았던, 내가 인정하지 않았던 그 세월 위에 그래도 녹이 슬고 또 싹이 트느니 이제 내가 불러도 대답하지 않을 當代여 당신의 외로움이 날 불러냈나, 내 그리움이 당신을 불러냈나, 외로움과 그리움이 만나 찬란하구나, 이 밤의 숱한 슬픔의 친척들이 만나 다정히 꼬리를 깨물고 깨물리우는 이 밤의 슬픔의 불꽃놀이여, 當代의 當代의 슬픔의 집합들이여

자칭 詩/ 최승자

자칭 詩/최승자 그러면 다시 말해볼까, 삶에 관하여, 삶의 풍경에 관하여, 주리를 틀 시대에 관하여, 아니, 아니, 잘못하면 자칭 詩가 쏟아 질 것 같아 나는 모든 틈을 잠그고 나 자신을 잠근다. (詩의 모가지여 가늘고도 모진 詩의 모가지여) 그러나 비틀어도 잠가도, 새어 나온다 썩은 물처럼, 송장이 썩어 나오는 물처럼, 내 삶의 썩은 즙, 한잔 드시겠습니까? (극소량의 詩를 토해내고 싶어하는 귀신이 내 속에서 살고 있다) * * * 허수경 시인의 시가 먹먹하다면 최승자 시인의 시는 섬뜩하달까 사랑에 관한한 아름답기보다 비극에 가깝고 삶의 환희보다 절망과 죽음에 더 가까운 삶을 살고 그런 언어의 시를 쓰는 분 그래서 더 생명력이 도드라지는... 어떤 삶이 정상이다 아니다라고 감히 누가 얘길할 수 있겠냐만..

모란과 작약을 구분할 수 있나요?/신미나

모란과 작약을 구분할 수 있나요?/ 신미나 당신은 신발을 꺾어신고 앞서간다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을 꾸면 이별수가 있다길래 벗어 놓은 당신의 신발에 몰래 발을 넣은 적도 있다 반뼘이 컸다 이 봄은 끝내 소아병동 앞뜰에 할미꽃과 개양귀비와 망초를, 모란과 작약을 풀어놓았지만 내 눈은 당신의 신발 뒤축에만 가 앉는다 거기 앉아 구겨져 산 지 오래되었다 손톱 깎아야겠네 내리는 햇빛에 손목을 내밀면 파란 핏줄이 * * * 나는 모란과 작약을 구분하지 못한다 꽃으로는 못하고 잎으로 조금 할 수 있다 구분하지 못한들 뭐 어쩌랴...나는 종묘상도 아니고 꽃집을 하는 것도 아닌데 식물도 번듯한 이름을 가진 것이 있고, 그 아류로 불리는 것들도 있다 같은 종에도 얼마나 많은 다른 개체들이 있던지 또 ' 개~ 로 시작되는 ..

모란/ 유홍준

모란/ 유홍준 고향 흙을 담아 꽃을 심는다 고향 흙은 푸슬푸슬하다 고향 흙은 자꾸만 어딘가로 가려고 한다 내 고향 흙은 마사토, 아무리 뭉쳐도 뭉쳐지지가 않는다 일평생 뭉쳐도 내 마음은 도대체 뭉쳐지지를 않는다 어떤 꽃을 심어도 내 고향 흙은 붉은 꽃만을 피운다 * * * 유홍준 샘이 오랫만에 시집을 묶으셨다 역시 선생님 스타일의 시 산청 집에 뭐 심을지 한참 고민 하셨는데 모란도 심으셨을라나... '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 시인동네 시인선 127 모란 잎은 셋으로 나뉜 물칼퀴, 작약은 나선형 한 잎으로 구분한다 꽃으로 구분하는 건 나로선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