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외국 시 9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가? 파블로 네루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가? / 파블로 네루다 하루가 지나면 우린 만날 것이다. 그러나 하루동안 사물들은 자라고, 거리에선 포도가 팔리며, 토마토 껍질이 변한다. 또 네가 좋아하던 소녀는 다시는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갑자기 우체부를 바꿔버렸다. 이제 편지는 예전의 그 편지가 아니다. 몇 개의 황금빛 잎사귀, 다른 나무다. 이 나무는 이제 넉넉한 나무다. 옛 껍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대지가 그토록 변한다고 누가 우리에게 말해주랴? 대지는 어제보다 더 많은 화산을 가졌고 하늘은 새로운 구름들을 가지고 있다. 또 강물은 어제와 다르게 흐른다. 또, 얼마나 많은 다른 것들이 건설되는가! 나는 도로와 건물들, 배나 바이얼린처럼 맑고 긴 교량의 낙성식에 수없이 참석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

선택의 가능성/ 쉼보르스카

선택의 가능성/ 쉼보르스카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줄무늬의 오래된 도안을 더 좋아한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명확하지 않은 기념일에 집착하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기념일처럼 소중히 챙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에게 아무것도 섣불리 ..

폴 발레리 석류들

폴 발레리 / 석류들 너희 알맹이의 과잉에 못 이겨 반쯤 벌어진 단단한 석류들아, 제가 발견한 것들의 힘에 겨워 파열하는 고매한 이마를 보는 것만 같구나. 너희들이 받아들인 햇빛이, 오 반쯤 입을 벌린 석류들아, 긍지에 시달리는 너희더러 홍옥의 칸막이를 깨부수라 하여, 껍질의 마른 황금이 어떤 힘의 욕구에 밀려 과즙의 붉은 보석되어 터질 때, 이 빛나는 파열은 내가 지녔던 어떤 영혼더러 제 은밀한 구조를 몽상하라 한다. 발레리(Paul Valery, 1871~1945) 프랑스의 시인이자 평론가. 작가 생활 초반에는 주로 상징시를 썼으나, 후반부에는 산문에 집중하여 학문 전반에 걸쳐 평론과 논고를 집필했다. 시집으로 “매혹”(1922) 등이 있다. * * * 석류 속 알맹이는 그야 말로 보석입니다. 이 詩..

D.H. 로런스- 제대로 된 혁명

D.H. 로런스 제대로 된 혁명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 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 혁명에 가담하지 마라 그저 원수들의 눈에 침이라도 한번 뱉기 위해서 하라 돈을 좇는 혁명은 하지 말고 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하라 획일을 추구하는 혁명은 하지마라 혁명은 우리의 산술적 평균을 깨닫는 결단이어야 한다 사과 달린 수레를 뒤집고 사과가 어느 방향으로 굴러 가는가를 보는 것이란 얼마나 가소로운가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도 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자력으로 괜찮은 귀족이 되는 그런 혁명을 하라 즐겁게 도망하는 당나귀처럼 뒷발질이나 한번 어쨌든 세계노동자를 위한 혁명은 하지마라 노동은 이제껏 우리가 너무 많이 해 온 것이 아닌가? 우..

윌리엄 세익스피어 소네트 73

윌리엄 세익스피어 / 소네트 73 한 해 중 그런 계절을 그대는 내게서 보리라, 전엔 예쁜 새들이 노래 했지만 이젠 황폐한 성가대석, 추위를 견디며 흔들리는 그 가지들 위에 누런 잎들 하나 없거나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계절을. 내게서 그대는 보리라, 해가 진 후 서녘에서 스러지는 그런 날의 황혼을, 만물을 휴식 속에 밀봉해 버리는 죽음의 분신인 시커면 밤이 조금씩 앗아가는 황혼을. 내게서 그대는 보리라, 불타오르게 해 준 것에 다 태워져, 꺼질수 밖에 없는 임종의 자리처럼, 제 젊음의 재위에 누눠 있는 그런 불의 희미한 가물거림을. 그대가 이것을 알아 차리면 그 사랑 더 강해져, 그대가 머지 않아 잃을 수 밖에 없는 그것을 더욱 사랑하게 되리라. 윤준 엮고 옮김( 한겨레 신문 신형철의 격주시화 " 셰익스..

마르셀 베알뤼- 나무들의 목소리, 어항

마르셀 베알뤼 나무들의 목소리 수줍으나 힘센 나무들은 밤마다 높은 목소리로 말하지만 그들의 언어는 너무나 단순하여 새들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체들이 재가 된 입술을 움직이는 묘지 옆에는 연분홍 송이로 피어난 봄이 처녀같이 웃고 있다 그리고 숲은 때때로 옛사랑에 붙들린 가슴처럼 창살을 흔들면서 긴 소리를 내지른다 어항 어항 속의 붕어 때문에 나는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내 눈은 연신 반짝거리며 움직이는 이 생물, 나의 고독의 공간을 채우는 유일의 생명의 조각, 쪽으로 쉬지 않고 되돌아갔다. 둥근 모양의 유리 항아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느라면 그 속에 사는 주인이 투명의 벽을 지나서 방 속으로 들어와 헤엄치며 그 금빛 파동으로 나를 놀리는 듯 했다. 어느 날 나는 참다 못해 어항을 깨뜨려 버렸다. 방바닥에는 한..

비수아바 심보르스카-두번은 없다

비수아바 심보르스카(폴란드 1923~) 가장 야릇한 세 낱말(The three oddest words) 내가 '미래'라는 낱말을 발음할 때 첫 음절은 이미 과거에 속해 있다 내가'침묵'이라는 말을 발음할 때 나는 그것을 깨뜨린다 내가' 무'라는 낱말을 발음할 때 나는 비존재가 결코 지닐 수 없는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 두번은 없다 (Nothing Twice) 두번 일어 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연습없이 태어나서 실습없이 죽는다 인생의 학교에서는 꼴찌를 하더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같은 공부를 할 수는 없다 어떤 하루도 되풀이 되지 않고 서로 닮은 두 밤도 없다 같은 두번의 입 맞춤도 없고 하나 같은 눈 맞춤도 없다. - - 어제,누군가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불렀을..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From July 1990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스웨덴 1931~) 1990년 7월에(From July 1990) 장례식에서, 죽은자가 내 생각들을 아무래도 나보다 잘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르간은 침묵을 지키고 대신 새들이 노래했다 따가운 햇살아래 구덩이는 드러 났다. 친구의 음성은 찰나의 먼 저편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 낮달이 내려다 보는 가운데 비와 정적을 뚫고 여름날이 번득이고 있었다 It was a funeral and I sensed the dead man was reading my thoughts better than I could.-- The organ kept quiet, birds song The hole out in the blazing sun My friend's voice li..

파블로 네루다- 시가 내게로 왔다

파블로 네루다 시(詩) 그리고 그 나이때 ...시가 내게로 왔어. 난 그게 어디서 왔는지, 그게 겨울이었는지 아니면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나는 몰라 아니, 그건 누가 말해 준 것도 아니고 책으로 읽은 것도 아니며 침묵도 아니었어 내가 헤매고 다니던 어떤 거리에서 시가 나를 불렀던 거야 밤의 한 자락에서, 뜻하지 않은 타인에게서 타오르는 성난 불길 속에서 혼자 돌아오는 고독한 귀로 그 곳에서 얼굴없이 있는 나의 가슴을 움직였어. 나는 뭐라고 해야할지 몰랐지, 내 입은 뭐라 말 할수 없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고 있었지 열정이나 잃어버린 날개, 내 나름대로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뭔지모를, 순전한 넌센스, (시에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