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1052

해감/고영민

해감/ 고영민 민물에 담가 놓은 모시조개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몇번을 소리쳐 부르자 당신은 간신히 한쪽 눈을 떠보였다 눈꺼풀 사이 짠 물빛이 돌았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나를 제 몸 속에 새겨 넣겠다는 듯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그러렁,그러렁 입가로 한 웅큼의 모래가 토해졌다 간조선干 潮線을 지나 들어가는 당신의 흐린 물빛을 따라 축축한 한 생애가 패각의 안쪽에 헐겁게 담겨져 있었다 짠물을 걸러내며 당신은 물무늬 진 사구를 온 몸으로 기고, 몸을 잊으려 한쪽 눈을 마저 닫자 날이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다. 울컥 울컥, 검은 모래가 걷잡을 수 없이 토해졌다 나는 당신의 손가락을 움켜쥔 채 더 깊은 물밑까지 따라 들어 갔다. 여윈 갈빗대에서 해조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제 오지마라! 따라 오지 마라고..

김예하 거꾸로 일력

거꾸로 일력/ 김예하 벽에 걸린 새벽이 낱장입니다 하루를 들었다 놓았다 오늘을 달래주세요 푸른 시간들이 내일 한장, 마른 잎 두장...지우고 있습니다 카운트다운은 사절입니다 나의 시간들을 철봉대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뒤편의 변수를 숭배하기로 했어요 내 손바닥 안에서 쥐락펴락한 것들, 캄캄할수록 더 명징한 한 줄기 빛이 아니라서 오늘이 끝점을 향해 점점 얇아집니다 빛도 호흡곤란이 있습니다 저 초록의 부스러기들 나를 비울 때까지, 내일의 운세는 인욕입니다 틈 사이로, 새벽이 나를 한장 떼거나 넘기는 방식으로 - 2018. 계간 ' 시현실' 신인상

빌미/ 송미선

빌미/ 송미선 작은 꼬투리를 잡아 달맞이 꽃을 피우기로 했어요 꼬투리를 빌미로 한바탕 춤판을 벌였어요 달이 변하는 것을 모서리와 모서리 틈에서 간신히 볼 수 있었지만 기억을 꺼낼 때마다 달이 조금씩 차오르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어요 당신의 표정에서 좁혀진 미간을 읽을 수 없지만 코의 핑계가 싹 트네요 누구의 입에든 오르내리기 위해 준비해 둔 대답에 알맞은 질문을 만들기로 했어요 그날은 오해라며 침 튀길수록 골은 깊어지고 검지로 넘기던 페이지가 감질나 페이지에 입술을 갖다댔어요 꼬투리를 헤아리는 사람들의 발 끝 고단함을 훑어 봤어요 뒤집어 쓴 모자 속에서 달맞이 꽃이 무더기로 나오네요 스며들 나를 스며든 당신이 밀어내는군요 원근법에 충실한 골목처럼 점점 좁아지는 숨구멍은 곧잘 진땀을 흘리네요 지금은 피노키..

털어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요/ 이원하

털어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요/ 이원하 오늘은 바다가 바다로만 보이지 않네요 살면서 없던 일이에요 견뎌야 하는 것들을 한편에 몰아두고 우연만 기다려요 살면서 없던 성격이에요 사흘 전부터 운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참새가 나무줄기에 앉을 때 제비가 낮게 날다가 꽃에 스칠 때 백로가 작은 돌에 안착할 때 이 흔한 사건들이 매번 운이라면, 왜 살면서 운을 못 믿었을까요 알처럼 생겨서 그랬을까요 알에 금이 가듯 운에도 금이 간다면 땀을 닦던 손이 차가워질 테고 이것은 운을 넘어선 행운이니 이 틈을 타 손에 앉은 서리를 녹이기 위해 어딘가를 툭 건드릴 텐데 건드리면 들킨 마음에 맛과 냄새가 있을까요 * * * ' 견뎌야 하는 것들을 한 편에 몰아두고 우연만 기다려요 . . 왜 살면서 운을 못 믿었을까요 인생이..

비망록/ 김경미

비망록/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신(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 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싱일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 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더 행복 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

장마-태백에서 보내는 편지/ 박준

장마/ 박준 -태백에서 보내는 편지 그 곳의 아이들은 한번 울기 시작하면 제 몸통보다 더 큰 울음을 낸다고 했습니다 사내들은 아침부터 취해 있고 평상과 학교와 공장과 광장에도 빛이 내려 이어진 길마다 검다고도 했습니다 내가 처음 적은 답장에는 갱도에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질식사나 아사가 아니라 터져 나온 수맥에 익사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종이를 구겨버리고는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 '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2018. 12. 13. 문학과 지성사 * * * 박준 두번째 시집의 표제였던 시네요. 내 성장기 신문기사나 뉴스에 갱도가 무너져 갇힌 광부 이야기 그들을 ..

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신발에 달팽이가 붙을까/ 이원하

하도리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슬슬 나가자 울기 좋은 때다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밭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테니 혼자 울기 좋은 때다 위로의 말은 없고 이해만 해 주는 바람의 목소리 고인 눈물 부지런하라고 떠미는 한번의 발걸음 이 바람과 진동으로 나는 울 수 있다 기분과의 타협끝에 오 분이면 걸어갈 거리를 좁은 보폭으로 아껴가며 걷는다 세상이 내 기분대로 흘러 간다면 내일쯤 이런 거, 저런 거 모두 데리고 비를 떠밀 것이다 걷다가 밭을 지키는 하얀 흔적과 같은 개에게 엄살만 담긴 지갑을 줘버린다 엄살로 한 끼 정도는 사 먹을 수 있으니까 한 끼쯤 남에게 양보해도 내 허기는 괜찮으니까 집으로 돌아 가는 길 검은 돌들이 듬성한 골목 골목이 기우는 대로 나는 흐른다 골목 끝에 다다르면 대문..

폭우반점/ 조우연

폭우반점暴雨飯店 / 조우연 주문한 비 한 대접이 문 밖에 도착 식기 전에 먹어야 제 맛 수직의 수타 면발 자작 고인 국물 허기진 가슴을 채우기에 이만한 요긴 다시 없을 듯 빗발 끊임없이 쏟아져 뜨거움으로 고이는 이 한끼 단언컨대, 죽지 말라고 비가 퍼 붓는다 자, 대들어라 피골이 상접한 갈비뼈 두 가락을 빼들고! * * * 장마, 폭우, 습한 기분... 코로나로 인해 의기소침한데다 여름 장마로 기분이 더 가라 앉을수록 몸이 움직여야 할 듯 대처해야 할 적이 눈앞에 있을 땐 오히려 자살률이 줄어든다고 문제는 그 이후라는데 조울증이나 우울증도 그렇다 감정의 최저에 있을 땐 기분따라 몸도 무기력해서 행동으로 잘 옮기지 않지만 상담공부 하다보면 최저에서 막 벗어 날 때를 조심해야한다는 그런 말이 있다 운동하러 ..

양양 하재연

양양/ 하재연 열 마리 모래무지를 담아 두었는데 바다로 돌려보낼 때 배를 드러낸 채 헤엄치지 못했다고 한다 집에 와 찾아보니 모래무지는 민물고기라고 했다 누군가의 생일이라 쏘아 올린 십연발 축포는 일곱발만 터져 행운인지 불운인지 모르겠다고 노란 눈알이 예뻤는데 물고기는 눈을 감지 못하니까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다고 했다 양양/ 하재연 물고기를 잡아야 돌아 갈 수 있다고 했다. 네 손바닥에 놓인 것이 조용했다. 해마도 물고기냐고 물었다. 해마는 말을 닮은 물고기라고 했다. 눈 뜬 해마는 식물 같아, 수컷이 새끼를 낳는다지. 너는 해마가 약으로도 쓰인다고 멸종위기라고 물에 사는 고기들이 다 고기인 건 아니라고 다음날이 도착했는데 죽은 해마와 나는 사람이 먹어야만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문학과 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