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1052

오늘 태어나는 말들에게/ 유혜빈

오늘 태어나는 말들에게/ 유혜빈 오늘 우리는 누군가의 낮에 그늘을 만들 수도 있고 누군가의 밤에서 어둠을 몰아낼 수도 있다 말이 생각에서 태어났다고 할까요 공기에서 태어났다고 해야할까요 진짜 같은 말과 가짜 같은 말들. 아마도, 조금은, 언젠가와 같은 단어는 마음이 숨도록 내버려두기 좋습니다. 진짜 같은 마음에 취하도록 빚 으시고 사랑을 증거하지 못하도록 만드신 날들 어쨋거나 말은 지금은 여기에서 태어났다 말은 이곳을 맴돌다가 누구의 귓가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이 흐를 때 말은 곧이 곧대로 흐르기로 결심한다 꿈에서만 만날수 있는 얼굴들. 당신이 기억에서 왔다면 이 꿈이 끝난 뒤 에는 어디로 갑니까. 누구에게 건넨 말들은 누구의 귓가에 뿌리 내립니까. 영영 모르는 이의 귓가로 흘러가는 가요 평생을 솜털처럼..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닌 여름/ 조민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닌 여름/ 조민 버찌는 검고 무서워요 하루아침에 까매져서 떨어지니까 몸 속에 흰약을 넣고 흰재를 먹고 죽은 사람을 생각합니다 몸속이 환하게 빛나고 반짝거리면 끝이라서 파란 파밭이 파파파 붉은 수수밭이 수수수 버찌가 아직 남았다면 그건 버찌의 일 여름이 할 일 아직은 우는 사람이 없어 꽁꽁 언 발톱을 깎고 무덤 같은 이불에 들어갑니다

홍어/ 신정민

홍어/ 신정민 말이 좋아 삭힌거고 숙성이지 결국은 조금 상한 것 아니겠는가 시들어 꽃답고 늙어 사람답고 막다른 골목이 길 답고 깨어 헛것일 때 꿈답던 꿈 우리의 한 시절은 모두 비(非)철에 이루어진다 냉동실에 안치된 채 구천을 떠돌고 있는 박봉규씨만 봐도 그렇다 노점공구상 그가 폭력적인 단속에 항의하다 분신, 목숨을 잃자 사람들은 그를 열사라 불렀다 우리 모두 열사가 될 수 있는 시대 그는 추리소설의 시작처럼 죽었고 덕분에 살아남은 우리들이 판을 쳤다 어둠아, 사람만큼 상한 영혼을 가진 물건이 어딨더냐 죽을똥 살똥 살아도 허구헌 날, 그날이 그날인 사람아 * * * 평범한 대다수 우리의 한 시절 모두 非철 시들어 꽃 답고 늙어 사람답고 막다른 골목이 길 답고 깨어 헛것일 때 꿈답던 꿈 박봉규씨의 삶처럼...

평행세계/ 김희준

평행세계/ 김희준 소나기가 지난다 당신은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을 나열하는 취미를 가졌다 책냄새를 달가워하지 않는 벌레가 낡은 책갈피를 덮는다 서점엔 괜찮다가도 괜찮지 않은 책들이 오르내린다 책장은 만들어지고 가구점에선 나무가 제 생을 다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내 자리 한칸 없다는 사실이 나를 밤으로 내몬다 과일가게에선 늙은 사과가 굴러 다니고 그해 블랙홀은 가운데가 뚫린 모양이라는 기사를 본다 그러면 우리에겐 서로의 심장 이 있다가도 사라지곤 했다 나는 사과를 먹었다가도 다시 뱉어내고 괜찮다가도 괜찮지 않아질 수 있었다 속성을 반복하는 것이 당신의 이름이라면 우린 자라면서 자라지 않는 측백나무 길을 산책로 삼았을 것이다 내리면서 내리지 않는 비를 맞으며 맨발로 걷다가 발에 밟힌 개미를 죽이면서 죽이지 않..

슬픔이라는 내용을 가진 한 때/ 강재남

슬픔이라는 내용을 가진 한 때/ 강재남 단단하고 헐거운 감정이다 일시에 터지는 빛이라는 거다 태양이 쓴 문장을 읽는다 흰 그림자를 가만히 본다는 거다 누군가 그리워하기 좋을 때다 골목너머로 시간이 진다는 거다 울음 닮은 침묵이 골목에 박제된다 돌아오지 않을 사람과 약속을 한다는 거다 빛이 빛으로 환원되는 순간,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익숙해지는 것들에 마음을 내려놓고 단단하고 헐거운 감정을 말린다 그림자의 휴식처를 궁금해 말아야 한다는 거다 낮고 초라한 곳이어도 그래, 그럴 때도 있지 담담해 진다는 거다 훌쩍 자란 계절의 뼈를 만진다 제 색으로 눈물을 만드는 사랑이라는거다 수선화 라일락이 지고 봉숭아 씨앗이 여문다 사람이 사람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 모던포엠 2020.7월호

여름 끝물/ 안미옥

여름 끝물/ 안미옥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무중력 공간에 두 눈을 두고 온 사람처럼 무엇을 보려고 해도 마음만큼 볼 수 없어서 그렇게 두 손 두 발도 전부 두고 온 사람으로 있다고 한다면 쓰지 않는 시간을 겪고 있다고 한다면 이해가 될까 이제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한 껏 울창해져서 어김없이 돌아오는 여름 불행과 고통에 대해선 웃는 얼굴로밖에 말할 수 없어서 아무말도 하지 않기로 다짐한 사람 절반쯤 남은 물통엔 새의 날개가 녹아 있었다 걸을 때마다 여름열매들이 발에 밟혔다 언제부터 열매라는 말에 이토록 촘촘한 가시가 들어 있었을까 다정한 얼굴 녹아버리는 것 밟히는 것 그 해의 맨 나중에 나는 것 우는 사람에게 더 큰 눈물을 선물하고 싶다 어떤 것이 자신의 것인지 모르게 1984 경기 안성 2012 동..

바퀴를 보면 세우고 싶다/ 반칠환

바퀴를 보면 세우고 싶다/ 반칠환 해묵은 비급, 당랑권을 선 보이며 불쑥, 국도위에 내려 앉는 사마귀를 보았다 찌를 듯한 기세가 미더웁다 저건 고서에도 있는 유서 깊은 싸움이다 그러나 흥분이 고조되기 전, 가볍게 승용차가 밟고 갔다 푸른 체액이 납작한 주검보다 멀리 흐른다 이게 그들이 펼친 무공의 전부다 하지만 사마귀들은 오늘도 푸른 푸섶에서 찬 이슬로 목을 축이며 새로운 검법을 연마하리라 반드시 질주하는 바퀴를 세우고 말겠노라고 바퀴처럼 둥근 달 둥글게 떠 오르면 더 한층 다짐하리라 * * *

악수/ 김희준

악수/ 김희준 비의 근육을 잡느라 하루를 다 썼네 손아귀를 쥘수록 속 도가 빨라졌네 빗방울에 공백이 있다면 그것은 위태로운 숨 일 것이네 속도의 폭력 앞에 나는 무자비 했네 얻어 맞은 이 마가 간지러웠네 간헐적인 평화였다는 셈이지 중력을 이기 는 방식은 다양하네 그럴 땐 물구나무를 서거나 뉴턴을 유 턴으로 잘못 읽어 보기로 하네 사과나무가 내 위에서 머리를 털고 과육이 몸을 으깨는 상상을 하네 하필 딱따구리가 땅 을 두드리네 딸을 잃은 날 추령터널 입구에 수천의 새가 날 아와 내 핵을 팠던 때가 있었네 새의 부리는 붉었네 바닥에 입을 넣어 울음을 보냈네 새가 물고 가버린 날이 빗소리로 저미는 시간이네 찰나의 반대는 이단(異端)일세 아삭, 절대 적인 소리가 나는 방향에서 딸의 좌표가 연결되는 중이네 물구나..

안개 제조공장 굴뚝에 사는 소녀를 아니?/ 정성원

안개 제조공장 굴뚝에 사는 소녀를 아니?/ 정성원 일정한 무게를 가진 안개 폐가 부풀어 하늘로 붕붕 뜬다면 누구 배 좀 눌러주실 분? 허공에서 소녀가 뿜는 안개는 단조로운 모양이야 이를테면 안개 공장장이 소녀로 가득찬 옷장을 가졌다든지 한명씩 꺼내 속을 갈라 본다든지 겉은 늙고 속은 생생한 아 이러니를 마주한다든지 옷장의 소녀가 갈라지는 건 단추야 그럼에도 심장이라 우겨볼까 상관 없고, 소녀는 달마다 죽은 태양을 낳는다 죽은 태양에 뿌리내린 안개나무, 온기를 흡수하지 못한 꽃송이, 전단지가 소리지르며 피어나 는 계절에 나무마다 물이 오른 수많은 실종이 만개하는 모습은 어떨 것 같아? 멈추지 않는 는개, 머리어깨무릎발무릎발, 멈추지 않는 노래 상실은 자주 노래를 부르게 한다 노래를 뿜어내는 굴뚝에서 포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