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1052

우리들의 파파야 나무/ Daisy Kim

우리들의 파아야 나무/ 데이지. Kim 태양이 몽글몽글 파파야 씨앗 같다 늙은 파파야를 양손에 받쳐 들고 숨은 아버지를 찾기로하자 싱싱한 파파야를 찾아버리자 노란 식감의 속살이 뭉개져 나 뒹구는 파파야, 고르고 골라도 나오지 않는 아버지 먼지가 엉킨 엄마의 머리카락 사이로 별 핀은 노랗게 녹이슬고, 까만떼의 촘촘한 개미 행렬은 우리 배처럼 줄줄이 고프고, 우리는 박스처럼 노랗게 질려 바닥처럼 납작하고, 1개의 파파야는 1달러 두개의 파파야도 1달러 몽땅 세일을 하자, 팔아버리자, 뭉개진 엄마를 팔고나면 박스만 남아, 불안한 우리는 우리를 박스에 담고, 싹수가 노랗다는 운명은 사는거예요? 파는 거예요? 아버지는 꽁꽁 어디에 있나 , 파파야의 미래는 노랗게 샛노랗게 누가 칠했나, 잎사귀에 낡은 동전 무늬를 ..

캐치볼/ 이승희

캐치볼/ 이승희 공을 던진다 어디에도 닿지 않고 그만큼 나의 뒤는 깊어진다 내가 혼자여서 나무의 키가 쑥쑥자란다 내가 던진 공은 자꾸 추상화 된다 새들은 구체적으로 날아가다가 추상화 되고 생기지 않은 우리 속으로 자꾸만 공을 던진다 거짓말처럼 저녁이 오고 밤이 오고 오는 것들은 일렬로 내 앞을 지나간다 칸칸이 무엇도 눈 맞추지 않고 잘 지나간다 모든것이 구체적으로 추상적이다 나는 불빛 아래서 살았다 죽었다 한다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세계가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여전히 공을 던진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친애하는 언니/김희준

친애하는언니/김희준 유채가 필 준비를 마쳤나봐 4월의 바람은 청록이었어 손 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썼던가 계절의 뼈를 그리는 중이라 했지 옷 소매는 죽어버린 절기로 가득했고 빈 틈으로 무엇을 키우는지 알 수 없었어 주머니에 넣은 꽃잎을 모른 체했던 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박음질이 풀릴 때 알았지 실로 제봉된 마음이었다는 걸 의 사는 누워있으라 했지만 애초에 봄은 흐린 날로 머무는 때 가 많았지 벚꽃과 유채가 엉킨 들판에 어린 엄마와 어린 언 니가 있어 놀이기구가 안개 속에 숨어 있었던 거야 숨바꼭 질을 좋아하던 언니가 이불과 옥상과 돌담 그리고 유채꽃과 산새와 먹구름 속으로 달려가는 한 때 비가 내리고, 물의 결대로 살 수 없다면 늙지 않은 그 곳으로 가자 소매 안에 훔쳤던 벚나무에..

백일홍/ 장만호

백일홍/ 장만호 개심사 배롱나무 뒤틀린 가지들 구절 양장의 길을 허공에 내고 있다 하나의 행선지에 도달할 때까지 변심과 작심 사이에서 마음은 얼마나 무른가 무른 마음이 파고 들기에 허공은 또 얼마나 단단한가 새가 앉았다 날아간 방향 나무를 문지르고 간 바람이, 붐비는 허공이 배롱나무의 행로를 고쳐놓을 때 마음은 무르고 물러서 그때마다 꽃은 핀다 문득문득 핀 꽃이 백일을 간다 사진: 남계서원 꽃 피지 않은 배롱나무

약속된 꽃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묻는 말들/ 이원하

약속된 꽃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묻는 말들/ 이원하 지금 여기는 물밖에 없어요 물이 몇 장으로 이루어져야 바다가 되는지 수분은 알까요 오늘따라 바다가 이름처럼 광야처럼 잔잔해요 잔잔해서 결이 없으니 바다가 몇 장인지 어떻게 셀까요 이와 비슷한 어려운 일들을 어려운지 몰라주며 세다보면 순간순간이 별거 아닌 것처럼 세다보면 선배처럼 될 수 있어요? 지금 거긴 꽃밖에 없어요 책에서 읽었는데 수분의 기운만 있다면 바다를 건너 꽃밭에 갈수 있대요 선배처럼 다른 소리지만 자다가 들었는데 파도가 잔잔해지면 가슴을 쓸다가 마음이 미끄러진대요 선배를 바라다보니 밤낮이 바뀌네요 밤하늘 촘촘 박힌 별을 보고 있자니 버리자니 많이 그런 어둠이네요 이 어둠처럼 내일 낮을 살아갈 거예요 선배, 이렇게 말해본 적 있으시죠 ' 약속..

서랍/ 신태희

서랍/ 신태희 입술 사이로 빗금이 흘러나와요 축축하지만 단호하지요 아침이랑 저녁은 이렇게 다른거예요 빛나던 것들이 어떻게 빛을 잃어가는지 하루만 살아봐도 알지요 간단하지요 이쪽과 저쪽, 그 사이 저녁 산둘기기처럼 꾸욱 꾹 가슴속으로 밀어넣어요 잿빛 눈동자를 구겨넣어요 살아내는 계절마다 서랍이 생겨나요 서랍은 서랍의 냄새로 서러워질 거예요 나프탈렌 동그랗고 하얀 눈물 냄새가 나요 그 사이로 내가 사라져요

꽃이라는 기호의 모습/강재남

꽃이라는 기호의 모습/강재남 우는 법을 잘못 배웠구나 바람은 딴 곳에 마음을 두어 근심이고 환절기는 한꺼번에 와서 낯설었다 오후를 지 나는 구름이 낡은 꽃등에 앉는다 매일 같은 말을 하는 그는 옹색한 시간을 허비하기 위해서다 눈시울 붉히는 꽃은 비극을 좀 아는 눈치다 비통한 주름이 미간에 잡힌다 구름의 걸 음을 가늠하는 것만큼 알 수 없는 꽃의 속내, 연한 심장을 가진 꽃은 병들기 좋은 체질을 가졌다 그러므로 생의 어느 간절함에서 얼굴하나 버리면 다음 생에도 붉을 것이다 얼굴이 수시로 바뀌는 계절에는 풍경이 먼저 쏟아졌다 헐거운 얼굴이 간단 없이 헐린다 낭만을 허비한 구름은 말귀가 어둡다 색을 다한 그가 급하게 손을 내민다 구름이 무덤으로 눕기 전에 꽃은 더 간절해져야 함으로 울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친절..

핑크뮬리/ 김희준

핑크뮬리/ 김희준 거미는 노을을 빨아 먹고 실을 뿜는다 태양의 잔상으로 피는 꽃도 다를 것 없다 물의 농도에 따라 들판은 짙어가고 새의 영혼이 흔들린다 용암정 오르는 길 겉옷 하나 살뜰하지 못한 계집애를 봤다 늙은 아비와 막걸리 냄새 진동하는 방안에 빨랫줄을 걸어 놓고 산다고 했다 추운 날 늙은 아비의 빨래를 하고 손등이 터져버린 계집애는 꽃을 말려 팔았다 어느 벼랑에서 꺾었기에 고혹한 향을 내는지 꽃차 머금으며 꽃차의 내력을 마신다 저녁의 지문을 허락받은 바람이 스며들 때마다 계집애의 단발머리와 오롯이 걸린 빨랫줄을 생각한다 길을 멈춘 늙은 아비가 딸에게 바칠 꽃 한움큼 사 갔기를 억새가 엉킨 들에서 구체적인 사람이 흔들리기를 그리고 거미가 짜내는 실로 저 계집애 옷이나 한벌 입히면 좋겠다 어둠으로 저..

꽃멀미/ 김충규

꽃멀미/ 김충규 새가 숨어 우는 줄 알았는데 나무에 핀 꽃들이 울고 있었다 화병에 꽂으려고 가지를 꺾으려다가 그 마음을 뚝 꺾어버렸다 피 흘리지 않는 마음, 버릴데가 없다 나무의 그늘에 앉아 꽃냄새를 맡았다 마음 속엔 분화구처럼 움푹 팬 곳이 여럿 있었다 내 몸 속에서 흘러내린 어둠이 파 놓은 자리, 오랜 시간과 함께 응어리처럼 굳어버린 자국들 그 자국들을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때 깊고 아린 한숨만 쏟아져 나왔다 꽃 냄새를 맡은 새의 울음에선 순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의 힘으로 새는 사나흘쯤 굶어도 어지러워하지 않고 뻑뻑한 하늘의 밀도를 견뎌내며 전진할 것이다 왜 나는 꽃 냄새를 맡고 어지러워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늘에 누워 올려다보는 하늘에는 구름이 이동하고 있었다 구름이 머물렀던 자리가 움푹..

미주의 노래/ 유혜빈

미주의 노래/ 유혜빈 마음은 고여본 적 없다 마음이 예쁘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마음이 영영 예쁘게 있을 수는 없고, 마음이 무겁다고 말한다고 해서 내 마음이 계속 무거울 수는 없는 것이다. 마음이 도대체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건 미주와 미주라고 생각 했던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다른 책을 읽다가 뒷목위로 언젠가 미주가 제목을 짚어 주었던 노래가 흘러 나오고 미주라고 생각 했던 사람이 미주를 바라 보았을 때 미주만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다 아무리 마음이 따뜻하다고 말해도 미주의 마음이 따뜻한 채로 있을 수는 없단 말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도 무지 없는 것이라서 마음이 흐를 곳을 찾도록 내버려 둘 뿐입니다. 너는 미주의 노래와 만난 적 없다 미주의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