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1052

무서운 꽃/오늘

무서운 꽃/ 오늘 사랑하는 빨강의자가 죽었다 휘청거리는 나무와 바라만 보는 너와 너무하다고 중얼거리는 나, 접힌 페이지에서부터 불의 상징을 지나는중야 하나는 목각인형이야 한껏 줄을 비튼다고해서 그게 춤이되겠어 슬픔에 비트가 붙으면 더 빠르게 몸을 훑는데, 미는 힘이 부족해서 서로에게 갇혀있나봐 어쩌다 그늘을 열고보면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내가 보일 거야 내 낡은 손목을 기억하니? 자꾸만 엉키는 영혼을 어떻게하면 좋을까 첫페이지에 앉아서 빗줄기를 긋고 싶은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래 지상으로 묶인 줄이 풀리면 재빠르게 공중으로 사라지는 꽃의 사람들 어제는 목련의 줄이 풀렸고 오늘은 장미의 줄이 느슨해지고 있어 내 향을 기억하니 너의 하루에서 지우고 싶은 것 이 뭐야 내 몸에 단물이 배어 있을때 붉게 사라지고 ..

국수/정서희

국수/정서희 저,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물이 젊 은 엄마일지 모르네 어떻게 오셨나요 메게이스*를 처방 받을 수 있을까요 아카시아 이팝나무 꽃들이 휙휙 달리는 초여름 국수 한 대접 훌훌 말아드시곤 한덩이 더 담아내던 엄마 지금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물, 엄마가 우려낸 젊은 엄마일지도 모르네 열무 넣고 보리밥 슥슥 비벼 숟 가락 부딪치며 먹던 때가 생각나 나요 양은 냄비 바닥에 깔린 밥마저 자식에게 물리시고 저만치 떨어 져 앉으시더니 이젠 입맛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앉으신 어머니 오오 지금 가마 솥에서 끓고 있는 물, 우리 엄마가 팔순지나고 아흔 이 되어 비로소 우려낸 현탁액인가요 * 메게이스내복현탁액: 식욕을 증진시킴으로써 암환자 및 에이즈환자의 식욕부진 및 체중감소를 개선시켜주는 약 * * * '문학과 사..

소금인간/정끝별

소금인간/ 정끝별 돌도 쌓이면 길이되듯 모래도 다져지면 집이되었다 발을 떼면 허공도 날개였다 사람도 잦아들면 소금이 되었고 돌이 되었다 울지 않으려는 이빨은 단단하다 태양에 무두질 된 낙타의 등에 얼굴을 묻고 까무룩 잠이들면 밤하늘이 하얗게 길을 냈다 소금길이 은하수처럼 흘렀다 품었다 내보낸 길마다 칠 할의 물이 빠져나갔다 눈썹 뼈 밑이 비었다 모래 반,별 반, 저걸 매몰당한 슬픔이라해야할까? 낙타도 한때 머물렀 으나 바람의 부력을 견디지 못한 발자국부터 사라졌다 소금 반, 흩어진 발뼈들 이 반, 끝내지 못한 것, 시간에 굴복하지 못한 것들의 백발이 생생하다 한 철의 눈물도 고이면 썩기마련, 한번 깨진 과육은 바닥이 마를 때까지 흘러나 오기 마련, 내가 머문 이 한철을 누군가는 더 오래 머물것이다 머문만..

누가 기억 속에 울새를 넣었을까/김필아

누가 기억 속에 울새를 넣었을까/김필아 먹빛 식탁보를 깔고 꽃이 수 놓인 매트를 올려 놓았다. 놋수저에 정갈한 일곱시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울새가 울었다 수백마리가 한꺼번에 요동쳤다. 너의 숲에 울새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퍼덕이던 깃털이 접시에 담긴다 너는 깃털을 씹는다. 씹을 때마다 식탁아래 깃털이 쌓이기 시작한다. 이러다 푹신한 이불을 만들 수도 있겠다고 넌 생각한다. 깃털을 씹고 있는데 몸에서 탄내가 났다. 의자에 몸을 비볐다. 입이 굳어진다 꿈속이 화석처럼 굳어간다 넌 애를 쓰고 있다 누가 자꾸 기억을 가져가는 것 같다고 목덜미를 길게 뽑아 콕,콕 관속을 쪼는 듯한 어스름이 덩굴 숲으로 오고 있다 노인의 졸음처럼 , 뚜르르 울새가 짤막하게 무음( 茂蔭 )속에서 울었던 거 같은 뚜르르, 몇개의 ..

배춧잎이 시들어간다/ 박희연

배춧잎이 시들어간다/박희연 1. 먹다 남은 배추 겉잎이 시들었다. 속잎이었던 그 겉잎은 싱싱했다. 싱싱한 것을 시들게 만드는 내공은 내게 있을까 시간에 있을까 돌아 보면 내 삶은 혐의로 가득 차 어깨가 움츠러들고 손이 오그라든다. 불안은 종종 표면적을 작게 만든다. 배춧잎이 조글조글 말라붙었다. 2. 가까이서 보면 크고 멀리서 보면 작다. 표면적을 작게 만드는 방법 하나 당신과 거리를 두는 일이다. 코로나 19시대의 인류애는 서로가 서로에게 보균자라는 혐의를 두는 것 3. 오래된 습관처럼 해가 뜨고 어제 저녁 먹다 남은 배춧국을 먹는다. TV에 비친 한 정신병동에서 누군가 죽이고 싶은 사람이 죽거나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죽어나간다. 저 죽음의 이면에도 아랑곳 없이 당신과 나는 숟가락을 놓지 않는다. 우..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가? 파블로 네루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가? / 파블로 네루다 하루가 지나면 우린 만날 것이다. 그러나 하루동안 사물들은 자라고, 거리에선 포도가 팔리며, 토마토 껍질이 변한다. 또 네가 좋아하던 소녀는 다시는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갑자기 우체부를 바꿔버렸다. 이제 편지는 예전의 그 편지가 아니다. 몇 개의 황금빛 잎사귀, 다른 나무다. 이 나무는 이제 넉넉한 나무다. 옛 껍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대지가 그토록 변한다고 누가 우리에게 말해주랴? 대지는 어제보다 더 많은 화산을 가졌고 하늘은 새로운 구름들을 가지고 있다. 또 강물은 어제와 다르게 흐른다. 또, 얼마나 많은 다른 것들이 건설되는가! 나는 도로와 건물들, 배나 바이얼린처럼 맑고 긴 교량의 낙성식에 수없이 참석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

서울로 가는 全琒準/안도현

서울로 가는 전봉준/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萬頃)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 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琒準)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 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못다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 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

책등의 내재율/ 엄세원

책등의 내재율/엄세원 까치발로 서서 책 빼내다가 몇 권이 기우뚱 쏟아졌다 중력도 소통이라고 엎어진 책등이 시선을 붙들고 있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햇살이 배슥이 꽂혀와 반짝인다 정적을 가늠하며 되비추는 만화경 같은 긴 여운 잠시, 일긋일긋 흔들린다 벽장에 가득 꽃힌 책 제목 어딘가에 나의 감정도 배정되었을까 곁눈질하다 빠져들었던 문장을 생각한다 감각이거나 쾌락이거나 그날 기분에 따라 수십 번 읽어도 알 수 없는 나라는 책 한권 이 오후에 봉인된 것인지 추스르는 페이지마다 서려 있다 벽 한면을 온통 차지한 책등의 숨소리를 듣는다 안쪽의 서늘한 밀착을 느낀다 표지가 서로의 경계에서 샐기죽 기울 때 몸 안의 단어들이 압사되는 상상, 책 갈피 속 한 송이 압화 같은 나는 허름하고 시린 과거이거나 목록이다 나는 쏟..

서천(西天)으로 / 최정례

서천으로 1 서천(西天)으로 냇갈에 고기 잡으러 갔다 솜 방맹이 석유 묻혀 깊은 밤 검은 내 불 밝히면 붕어들 눈 멀거니 뜨고 가만 있었다 흐르는 냇갈 안고 자고 있었다 밑 빠진 양철통 갖다 대도 아직 세상 흐르는 줄 알고 가만 있었다 우리 언니 죽을 때 꼭 그랬다 착한 눈 멀거니 뜨고 입 벌린 채 서천으로 2 혼자 우는 새가 있었고 빈 자리가 혼자 비어 있었고 조금 비껴 서서 꽃이 피었고 괜찮아 괜찮아 앉은뱅이꽃들 쓸어안았고 돌아 앉은 얼굴들 바람에 터졌고 내 마음에 영 어긋난 길을 떠났고 * * * 최정례 시인 66세로 영면에 드셨습니다. 창작이란 거, 특히 시를 쓰는 일 사람이 할 수 있는 정신영역 최고의 결과물이자(승화(昇華)) 영혼이 얼마나 힘들게 몰아 부쳐야 하는 일인지 조금은 압니다 ' 우리..

사기(史記)꾼/김희준

사기(史記)꾼/ 김희준 팔지 않겠습니다 은퇴한 별이 너머에서 잠들고 몇 세기 밤이 광물로 굳어 졌다네 이런 밤엔 무엇도 되고 싶지 않네 먹에 끼인 구름을 피해서 계절은 도래하더군 벼루를껍질 삼았다는 말일세 적 어도 글 같은 모양새로 걷지 않겠나 발가락으로 글이 써진 다면 그까짓 변신이 두렵겠나 토막 난 성기는 폐허와 같아 거세된 문장이 동굴을 밝히 면 나는 어둠이 된다네 어둠은 그대로 검정이어서 어떤 걸 넣어도 좋다네 캄캄하게 물드는 것이 손 뿐이겠나 헤집은 곳 마다 내가 튀어나오더군 가끔은 피카이아가 잡히기도 했지 그럴 땐 그것이 고전적 유물론자인지 고대의 투명한 저녁인 지 알길이 없었다네 아무렴, 나는 팔지 않을 작정이네 동굴에는 척추로 생을 쓰는 내가 있었을 뿐이네 실존을 부끄러워하는 까닭은 어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