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인 그늘의 공학 그늘의 공학/ 박정인(정옥) 느티나무에 출입금지판처럼 표지가 나붙었다 옹이는 막힌 길, 가지가 방향을 바꾸려는데 걸린 시간의 배꼽이다 다다르지 못한 초록에게서 필사의 아우성이 이글거릴 때 직박구리 한 마리, 옹이를 박차고 날아오른다 수액 길어 올리던, 이제 사라진 가지의 길.. 시로 여는 일상 2019.06.22
때/ 휘민 때/ 휘민 지하철을 타고가다 보면 덜컹거리는 바퀴의 율동이 갑자기 바뀌는 때가 있지 꾸벅꾸벅 졸고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크게 고개를 떨구는 때 마주보고 있는 레일이 서로에게 한 번씩 기울여지며 균형을 맞추는 앞으로 달려가기 위해 허공에 망치질을 하며 기울어짐을 연습하는 순.. 시로 여는 일상 2019.06.21
이상적인 관객/ 휘민 이상적인 관객/ 휘민 그때 나는 당신보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취해 바라본 강촌의 노을을 사랑했다 당신을 사랑했던 그 시간을 그리워하기 위해 그날 우리가 함께 물수제비 뜨던 그 강물에게 말해야 했다 나는 영원히 당신의 고통에 닿을 수 없을거라고 당신에게 눈먼 마음을 들키기 싫어 .. 시로 여는 일상 2019.06.19
항상성 김정진 항(상)성/ 김정진 여기서 잠시 불을 붙였다 갑시다 여름을 빨리 불러오고 싶었어요 하지(夏至)의 높은 태양을 만원버스 안에서 같은 리듬으로 동시에 흔들리면서 서로를 기대하고 기다리면서 손이 녹을 수 있도록 몸이 따뜻해지도록 태울 것들을 좀 찾아 봅시다 종점은 처음인가봐요 당신.. 시로 여는 일상 2019.06.14
박서영 달과 무 달과 무/ 박서영 우리는 서로에게 영혼을 보여준 날부터 싸우기 시작했지 달에 간판을 달겠다고 떠나버린 사내와 나는 벚꽃나무에 간판을 달다가 떨어진 적이 있고 침묵하는 입술은 나를 취하게 하네 난 꽃도 아니다. 이젠 무언가를 말해 주기를 지나버린 시간에 석유를 끼 얹고 불을 지.. 시로 여는 일상 2019.06.13
박서영 시 천국 천국/ 박서영 " 나로선 말이다. 널 용서한다. 그러나 알겠니 얘야, '천국'을 다치게 해서는 안되는 거야."* 밤의 국도에서 고라니를 칠 뻔 했다 두 눈이 부딪쳤을 때 나를 향해 오히려 미안한 표정을 짓던 고라니의 검고 큰 눈망울 오랫동안 그걸 잊지 못하고 있다 그날 이후 그 길을 지날 땐 자꾸 뭔가를 만지게 돼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천국을 아직도 돌려주지 못하고 있어요 내가 갖고 있어요 천국은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사라졌지요 도리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당신의 천국도 내가 갖고 있답니다 잠시 갖고 있다가 돌려주려고 했지만 * 앙리 보스코 '반바지 당나귀'에서 '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2019. 2 . 문학동네 '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 걷는 사람 시인선 박서영 유고시집 두편.. 시로 여는 일상 2019.06.12
최문자 깊은 해변 깊은 해변/ 최문자 파고다 공원 노인들이 출렁거린다. 독립선언이후 여기는 노인들의 허기만 파도치는 깊은 해변, 노인들이 하루종일 녹는다. 흰 알약이 녹을 때 처럼 표정이 나가고 힘줄이 녹고 질긴 지느러미만 남아서 기형의 유영을 끝내고 엉거주춤 나와 앉는다. 얼어붙은 입술이 태.. 시로 여는 일상 2019.06.10
아이에게/ 이원 아이에게/ 이원 인사한다. 이상한 새소리를 내서. 인사한다. 꽃잎과 꽃잎 사이의 그늘에 숨어. 인사한다. 작은 나무 아래 그림자가 되어. 인사한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얼굴이 되어. 인사한다. 없는 모자를 벗어 두 손에 들고. 인사한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로. 인사한.. 시로 여는 일상 2019.06.09
심언주 관계 관계/ 심언주 비둘기 그림자는, 비둘기 곁에서 콘크리트 바닥을 쪼 아 댄다. 제법 곁눈질이 늘어 비둘기보다 큰 부리로 비둘 기보다 더 깊이 바닥의 침묵을 흠집 낸다. 기회를 보아 비둘기를 생포할 자세다. 그러나 비둘기가 날아오르면 제 아무리 큰 보폭으로 쫒아가도 얼마 못 가 비둘기.. 시로 여는 일상 2019.06.08
장미키스/ 최정란 장미키스/ 최정란 장미와 입을 맞추었지 가시를 끌어당겨 장미 향기를 입술 안으로 깊이 빨아들였지 장미는 벌린 내 입을 더 크게 벌리고 내 심장을 꺼내 가졌지 그날부터 나는 심장이 없지 장미와 같은 시간을 호흡했지 바다와 하늘도 같은 고요를 들이쉬고 내쉬었지 별의 어깨를 출렁거.. 시로 여는 일상 2019.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