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1052

기형도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기형도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 반 시외버스도 떠난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 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 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 들어 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

박소유 골목을 사랑하는 방식

골목을 사랑하는 방식/ 박소유 누구에게나 그런 곳이 있지 자기만 들어가면 벌써 어두워지는 저쪽 한번도 뱉지 않은 자신의 과거를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저쪽 사람들은 죽은 자들처럼 감정이 없어야 하지 뒷골목을 앞으로 낸다고 햇빛 쏟아지는 들판이 될 순 없겠지만 조그만 기척에도 가슴 뜨거워질 때가 있지 금방 죽을 꽃을 왜 사다 꽃는지 꼬마선인장은 벌써 말라비틀어졌고 피 묻은 날계란처럼 짜장을 뒤집어쓰고 있는 중국집 그릇은 좀 씻어서 내놓으면 안 되나 더 이상은 잔소리다 산자들의 감정에는 구석이 있어서 자꾸 모퉁이가 생긴다 오지 않은 앞날이나 지나간 것들에 대해서 말하지 말자 뒷골목에도 나름 지켜야 할 게 있다고 (이건 정의가 아니고 예의다) 어둠을 건너뛰는 고양이 발끝이 조심스럽다 * * * 누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