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아이에게/ 이원

생게사부르 2019. 6. 9. 09:30

아이에게/ 이원



인사한다. 이상한 새소리를 내서.
인사한다. 꽃잎과 꽃잎 사이의 그늘에 숨어.
인사한다. 작은 나무 아래 그림자가 되어.
인사한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얼굴이 되어.
인사한다. 없는 모자를 벗어 두 손에 들고.

인사한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로.
인사한다. 물방울 속에서.
인사한다. 모든 예의를 갖춘 한 마리 새처럼.
인사한다. 색색의 치장을 한 한마리 새처럼.
인사한다. 소란한 손과 발을 지우고.

    꽃봉오리

    4월

    소풍

    풍선 풍선들

 

인사한다. 너에게. 나타나지 않으면서.
인사한다. 너에게. 흐려지며.

인사한다. 똑딱.
인사한다. 단추.
인사한다. 심장.
인사한다. 멈춤.


없는 모자를 벗어 두 손에 들고.

 

인사한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로.

인사한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인사한다. 얼굴이 쏟아지도록.

인사한다. 손을 뻗어 쓰다듬지 못하고.

인사한다. 바람이 부드럽게 눈 감겨주기를.

인사한다. 꼭 쥐고 있던 주먹은 내가 가져온다.

 

 

인사한다. 꽃봉오리가 열리도록

인사한다. 학교 앞 공원을 따라 걸으며.

인사한다. 교문으로 향하는 언덕을 오르며

인사한다. 데리고 왔다. 너의 목소리. 간결한 길.

인사한다. 거역할 수 없는 순진함에.

인사한다. 장미가 피어날 시간으로

인사한다. 목덜미에.

인사한다. 풀밭에서.

인사한다. 데리고 왔다. 둥근 풀밭.

인사한다. 침묵을 조금 옮겨 놓으며

인사한다. 봄을 조금 옮겨 놓으며

 

인사한다.

 

긴 행렬

 

 

 

                             - 사랑은 탄생하라. 2017. 문학과 지성사

 

 




'시로 여는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서영 시 천국  (0) 2019.06.12
최문자 깊은 해변  (0) 2019.06.10
심언주 관계  (0) 2019.06.08
장미키스/ 최정란  (0) 2019.06.07
장석남 꽃차례  (0) 2019.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