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1052

유홍준 시인 청마 문학상 시상식

축하가 늦었네요. 통영시문학상 4개 부문 최종 수상작 선정 청마 유홍준(시), 김춘수 이은규(시), 김상옥 우은숙(시조), 김용익 최진영(소설) ▲통영시문학상 수상자(사진 위 왼쪽부터) 유홍준, 이은규, 우은숙, 최진영 작가. ⓒ통영시 올해 수상작으로는 청마문학상에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유홍준, 시인동네), 김춘수 시 문학상에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이은규, 문학동네), 김상옥 시조문학상에 ‘그래요, 아무도 모를거에요’(우은숙, 시인동네), 김용익 소설문학상에 ‘겨울방학’(최진영, 민음사)이 선정됐다. 상금으로 청마문학상 수상자에게는 2000만 원, 그 밖의 수상자에게는 1000만 원씩 총 5000만 원의 창작지원금이 수여된다. 시상식은 코로나19 여파로 인해 10월 중 사회적 거리두..

단풍속으로/ 박명숙

단풍속으로 / 박명숙 드디어 산빛은 가속을 내고 폭풍처럼 불길이 들이닥칠 때 티끌도 흠집도 죄다 태우며 미친 하늘이 덤벼들 때 맞습니다. 길은 보이지 않고 바람이 우리 몸뚱이 통째로 말아버리면 어디선가 어둠도 저린 발가락 피가 나도록 긁고 있겠지요 접었던 시간의 소매를 내리며 먼 기억들이 박쥐처럼 날개를 펴고 휘몰아치는 단풍속으로, 속으로 마구 날아드는 것이겠지요 끝도 없이 서로 얼굴을 부딪치며 세상의 굽이마다 서로 얼굴을 부딪치며 세상의 굽이마다 떨어져 쌓일 때 서둘러 낭떠러지가 올라오고 있는 것이겠지요, 지금 * * * 좀 오래 된 시임에도 여름 폭풍우 휘몰아치 듯 파도가 휘몰아쳐 윈드서핑하는 사람을 감아 올리 듯이 미친 듯이... 휘몰아 치는 단풍의 폭풍 서둘러 낭떠러지가 올라오고 있다는... 어제..

싱싱한 죽음/ 김희준

싱싱한 죽음/ 김희준 편의점에는 가공된 죽음이 진열 돼 있다 그러므로 꼬리뼈가 간지럽다면 인체신비전 같은 상품을 사야한다 자유를 감금당한 참치든 통으로 박제된 과육이든 인스턴트를 먹고 유통기한이 가까운 상상을 한다 여자를 빌려와 글을 쓰고 사상을 팔아 내일을 외상한 다 통조림에는 뇌 없는 참치가 헤엄쳤으나 자유는 뼈가 없다 냉장고를 여니 각기 다른 배경이 담겨 있다 골목과 심해 다른 말로 배수구, 그리고 과수원 세번 째 칸에 는 누군가 쓰다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다 빌어먹을 허물 싱싱하게 죽어 있는 편의점에는 이름만 바꿔 찍어내는 상품이 가지런하고 형편 없는 문장을 구매했다 영수증에는 문단의 역사가 얼마의 값으로 찍혀 있다 가을호. 시와 문화사, 2018 * * * 오늘 대..

맨 처음/ 신정민

맨 처음/ 신정민 사과는 사과꽃에 앉은 별의 더듬이가 맨 처음 닿은 곳에서 썩기 시작한다 바람이 스쳐간 곳, 햇볕이 드나들며 단맛이 들기 시작한 곳, 맨 처음 빗방울이 떨어진 곳 사과는 먼 기찻길에서 들려온 기적소리, 사과의 귀가 맨 처음 열린 곳에서 썩기 시작한다 익어가는거야, 씨앗을 품고 붉어지기 시작한 곳에서 사과는 썩기 시작한다 썩고 있는 체온으로 벌레를 키워 몸 밖으로 비행을 꿈꾼다 온 힘을 다해 썩는 사과는 비로소 사과가 된다 전북전주 2003 부산일보 신춘 2008 꽃들이 딸꾹, 시선

손가락 선인장/ 정성원

손가락 선인장/ 정성원 장마가 시작되면 마르는 것을 생각 해 비의 그림자가 버석거린다 냄새는 말캉하고 죽으면서 말캉한 비 젖는 곳이 있다면 한쪽은 증발하는 마음 공평한 방식으로 비가 내린다 비의 얼룩이 지워지면 백단이 핀다 오아시스로 가자, 서로의 손가락을 깨물며 광활한 모래언덕으로 가자 갈망은 처음부터 목이 마르는 목적을 가졌지 그것은 행선지를 방황하는 모래 알갱이처럼 우리의 방황이 깊어진다는 말 등을 구부릴 때마다 굴곡진 생의 촉수를 달고 한번도 내 편인 적 없는 너를 생각할래 백단 숲에 손가락이 핀다 알수 없는 감정이 괜찮다는 표정으로 흔들린다 비의 내용을 기록하는 손가락이 버석거린다

에덴의 호접몽/김희준

에덴의 호접몽/김희준 내 어미는 누굽니까 번식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존재합니까 나는 날개 달린 뱀입니까 찰나에 떨어진 능금꽃입니까 성서는 오독입니다 압축된 문장에서 능금은 꽃이 분리되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꿈이 천연색으로 물드는 건 이승과 저승의 구별법이라 여겨도 좋을까요 거울의 중간 지점을 꿈이라 해 둡시다 전생이 껍질을 벗는 것은 거울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거울에서 자랍니다 물읍시다 나는 누구의 잠에 존재합니까 이렇게 오래 잠을 자도 괜찮습니까 잠의 프리즘에 분산되는 나는 당신입니까 나를 길들이려는 당신이 나입니까 허락한다면 아내를 삼았으면 합니다 어쩌면 이전부터 나는 내 아내일지 모르겠군요 내가 나를 삼킬 때 아내는 환생합니다 자각자각 , 허기진 나를 먹습니다 행방이 묘연한 네펜데스를 찾..

깊은 개념은 얕은 문학시간에 다 배운 것 같아요/정성원

깊은 개념은 얕은 문학 시간에 다 배운 것 같아요/ 정성원 봄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에서 시를 배운다 시의 해석을 받아 적는 것은 신물 나는 일, 나에게 주어진 하늘은 네모난 창 위로의 말이 창 밖에서 서성인다 이팝 나무와 나비를 구분 못하는 눈이 나에게 필요할까요 눈을 바람에게 주고 깊은 잠에 빠질까요 수척한 바람이 손짓을 한다 떨어지는 꽃잎이 구름쪽으로 가 닿는다 구름 너머 보이는 아버지 바다에서 출령여야 할 당신이 햇볕물살을 그물에 담고 있다 빌어먹을 아버지, 나는 지금 푸른 하늘이 필요하다고요 이쯤에서 아버지에게 날개를 입혀주면 흥미로울까 잘. 생각말고 잘- 생각하라던 문학수업은 순전히 말장난 형식적인 문학선생은 건조한 기호 아버지와 나는 아빠와 구름이라는 단조로운 공감각 언어를 탐색하는 우리는 일..

폴리트비체의 겨울/Daisy Kim

폴리트비체의 겨울/ Daisy Kim 우리는 여름으로 가는 방향을 몰라서 버려진 빵조각을 따라 희게 빛나는 계절을 걸었다 눈 앞에 나타난 겨울이 얼어 붙었고 여기가 내 세계라고 착각했다 쌓아온 관계가 부패한 빵처럼 바닥에 달라붙은 이끼들 나무의 어깨가 흔들리면서 닿았던 손가락들이 툭툭 겨울의 깃털을 건드리면 어느새 날아가고 마는, 그 이름 살갗으로 쏟아지던 폭포에 질문처럼 거듭 매달리며, 미끄러지지 않고 견디는 투신은 없다고 죽은 물의 화법으로 이 름을 새겼다 소나기가 쏟아졌고 버려진 빵조각이 씻기고 언 가슴이 녹는 소리가 호수 위에 내려 앉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제를 말하면서 에메랄드빛 여름이 궁금하다던 너는 침묵했고 빛나는 이름을 벼랑에 새기고 싶어, 천천히 가는 뒷모습 작아지는 등이 오래도록 젖었다 ..

주동자/ 김소연

주동자/ 김소연 장미꽃이 투신했습니다 담벼락 아래 쪼그려 앉아 유리처럼 깨진 꽃잎 조각을 줍습니다 모든 피부에는 무늬처럼 유서가 씌어 있다던 태어나면서부터 그렇다던 어느 농부의 말을 떠 올립니다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을 경멸합니다 나는 장미의 편입니다 장마전선 반대를 외치던 빗방울의 이중국적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이 모두 다 아는 일이 될 때까지 빗방울은 줄기차게 창문을 두드릴 뿐입니다 창문의 바깥쪽이 그들의 처지였음을 누가 모를 수 있습니까 빗방울의 절규를 밤새 듣고서 가시만 남은 장미나무 빗방울의 인해전술을 지지한 흔적입니다 나는 절규의 편입니다 유서 없는 피부를 경멸합니다 쪼그려 앉아 죽어가는 피부를 만집니다 손톱밑에 가시처럼 박히는 이 통증을 선물로 알고 가져갑니다 선물이 배후입니다 ..

월광욕/ 이문재

월광욕/ 이문재 달빛에 마음을 내다 널고 쪼그려 앉아 마음에다 하나씩 이름을 짓는다 도둑이야! 서로 화들짝 놀라 도망간다 마음 달아난 몸 환한 달빛에 씻는다 이제는 가난하게 살 수 있겠다 * * * ' 마음 달아난 몸' 애초 욕심이 없으면... 코로나중에도 추석은 보내야지요 몸이 고되든지 돈이 고되든지 둘 중 하나는 감수가 되는데 둘 다 고되면 서글프겠네요. 부디 마음이 힘들지 않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