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1052

박꽃/ 박은형

박꽃 / 박은형 석양에 발이 빠져 통성명만 겨우 하고 다시 저녁을 허문다. 마중과 배웅의 표지판처럼 며칠 째 박꽃, 퍼뜨리고 싶어서 흰, 아무도 현혹할 수 없게 낡아서 흰, 몰래 설화처럼 피었다 져서 흰, 들키라고 아니 들키지 말라고, 아니 될대로 되라고 문틈에 끼워 놓은 쪽지라서 흰, 한 송이로 무성해서 흰, 정말이지 꽉 들어차 자꾸 쏠리는 눈자위라서 흰, 당신에게 꼭 어울려서 흰,흰,흰 당신이라는 단 한번의 양식樣式

앵두의 폐사지/ 박은형

앵두의 폐사지/ 박은형 꽃지는 길을 따라가다가 보게 되었네 깊은 흙잠에 들었다 깨어났다는 절집이었네 한 시절 영화는 계단석 돌꽃으로 다시 피고 있었네 석등 연화를 받들고 쌍사자 두분 다정해지셨네 무릎걸음의 희붐한 고요가 영영 한참이었네 오월의 옛집 마냥 심정 푸르른 폐허였네 다 울지 못한 울음, 물앵두 한 그루로 접혀 있었네 오래 욱여 둔 몸의 소용돌이 찬란하게 떨구고 있었네 젖은 신을 끌며 돌아오다 마주친 석양 같은 것 붉게 웅크리다 뛰어내린 호젓한 이름 같은 것 절터는 매듭 없는 풍경을 흠씬 벗어 놓았네 폐허의 숨결들은 달콤한 귀 하나면 봄날이었네 뭉텅뭉텅 마음져 버리기 좋은 봄날이 바람불고 있었네 * * * 시는 봄날이라는데 스산한 풍경이네요 폐사지는 탄생보다는 소멸쪽이라 특별한 계절 감각없이 폐라..

거꾸로 일력/ 김예하

거꾸로 일력/ 김예하 벽에 걸린 새벽이 낱장입니다 하루를 들었다 놓았다 오늘을 달래주세요 푸른 시간들이 내일 한장, 마른 잎 두장...지우고 있습니다 카운트다운은 사절입니다 나의 시간들을 철봉대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뒤편의 변수를 숭배하기로 했어요 내 손바닥 안에서 쥐락펴락한 것들, 캄캄할수록 더 명징한 한 줄기 빛이 아니라서 오늘이 끝점을 향해 점점 얇아집니다 빛도 호흡곤란이 있습니다 저 초록의 부스러기들 나를 비울 때까지, 내일의 운세는 인욕입니다 틈 사이로, 새벽이 나를 한장 떼거나 넘기는 방식으로 - 2018. 계간 ' 시현실' 신인상 * * * 또 한 장 달력을 떼어내자 들어선 12월 달랑 낱 장이 남습니다. 코로나로 시작한 유례가 없는 한 해였습니다. 올해 신입생은 제대로 입학도 못해보고 학교..

한영미 이상한 나라 앨리스, 굴레방 다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한영미 라면으로 첫 끼니를 때운다 바닥엔 파지처럼 굴러다니는 쓰다만 이력서들 열정 하나로 통했던 시대는 갔다 모래 수렁을 떠도는 비문의 유령들, 오늘은 이 회사에서 내일은 저 회사에서 같은 얼굴을 만나고도 기억하지 못한다 모래바람은 깊은 수렁을 덮기도 하고 만들어내기도 한다 빠져나오려는 안간힘은 처음 몇 번의 좌절이면 족했다 움직일수록 흘러내리는 모래의 깊이는 늪처럼 빠져들고, 바닥처럼 측량되지 않는다 입구가 사라지는가 하면 출구가 봉합되기도 한다 수렁이 무덤이 되는 것은 한순간, 어제도 국화 한 송이를 놓고 왔다 가수와 진수가 구별되지 않는 교묘함에도 구덩이를 채운 숫자는 갈수록 넘쳐난다 무릎이 튀어나온 츄리닝, 쌓여가는 빈 소주병이 발굴된 유물의 전부가 될 것이다 전화 한 통이..

각시거미/ 이삼현

각시거미 / 이삼현 그녀와 나 사이 서먹해진 간격에 집을 지은 거미가 한 점 침묵으로 매달렸다 말끝을 세운 몇 가닥 발설이 한데 얽혀 덫이 되고 하루, 이틀, 사흘 무엇을 먹었는지 마셨는지 소식도 없이 제자리에 멈춰있다 나는 여문 것을 좋아하고 그녀는 부드러운 걸 좋아했지만 거미의 식성은 육식성이다 단단한 저녁이 말랑말랑해진 태양의 육즙을 천천히 빨아 삼키는 동안 거미는 한마디 미동도 없이 어두워졌다 몰래 들여다봐도 내통도 없다 팽팽하게 벌어진 틈새를 붙잡고 며칠째 끈적끈적한 긴장의 끈을 당기는 저 고집은 불통이다 꼭 돌아올 거라며 활짝 열어둔 오늘이 무음(無音)으로 져도 마음은 나팔처럼 불 수가 없다 경계를 풀고 다가올 기척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순간이 쉼표 없는 기다림으로 이어지고 죽은 듯 산 듯 다..

옛, 성윤석

옛, 성윤석 옛, 이라고 첫발음을 떼려다가 그만두었다 옛, 이라고 하는 순간 앞은 사람이 울고 있었다 투명한 빛을 가진 술잔엔 옛, 이라는 벚꽃잎이 옛, 이라는 집과 창문이 옛, 이라는 사랑이 땅거미처럼 다가와서 사태졌다 발음만 해도 흘러 무너진 곳이 다시 무너지는 곳 그 곳이 옛, 이었다 * * * 옛날이라 할 것을 옛, 이라해서 시인의 단어가 되고 시가 되는... 시인의 다른 시 제목도 생각난다 쑥, 척... 단어가 아닌 한 글자만으로도 충분하다 풍성하다

아무나 씨에게 인사/ 김희준

아무나씨에게 인사/ 김희준 아무나씨는 절박한 순간에 다정해지곤 했다 바닥에 붙어 걷는 내 오랜 습관과 상처 많은 무릎을 혼내는 일 누르는 만큼 들어가는 모래는 완만한 표정을 가져서 중력의 무게만큼 들어간다 그러면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 아는 척 하고 아는 사람을 모르는 척하는 마음을 설명할 수 있을 텐데 내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금방 친해질텐데 손에 손을 잡고 나를 떠나갈 텐데 아무나씨의 도드라진 등뼈를 만지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무거워진 마음은 목도리를 벗게하고 우리는 함께 겨울 바다에 갇혀야 할 명분을 얻기도 했다 가져본 적 없는 손가락이 환상통을 앓는 밤이면 마디가 아파온다 밤 하늘엔 도드라진 행성의 등뼈가 떠 있고 우린 밤하늘을 거대한 동물의 등뼈라 부르며 동물의 이름을 헤아린다 고대의 인류가..

발자국은 신발을 닮았다/ 이원

발자국은 신발을 닮았다 / 이원 발을 넣으려는 순간 왈칵 어두운 현관의 두 짝 신발이 축축하게 제 몸을 다 벌리고 있다 허공에 있던 발을 내리고 주저앉으니 공기의 냄새가 비어 있다 신발 안을 들여다 본다 꾹꾹 몸이 걸었으므로 길이 되어버린 마음이 우글우글하다 신발을 굽어보던 빈 몸이 뻣뻣해 벽에 몸을 기댄다 길이 되지 못한 벽이 움찔거려 기댄 벽이 무겁다 세계의 어디서나 출입구는 입과 항문처럼 뚫여 있다 두 발로 단단한 바닥을 딛으며 다시 일어선다 (새삼 발자국은 신발을 닮았다!) 신발 속으로 현실의 발을 집어 넣는다 그 속은 아득하고 둥글다 한 발을 살짝 문 밖으로 내민다 덥썩 세계의 입이 닫힌다

선택의 가능성/ 쉼보르스카

선택의 가능성/ 쉼보르스카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줄무늬의 오래된 도안을 더 좋아한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명확하지 않은 기념일에 집착하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기념일처럼 소중히 챙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에게 아무것도 섣불리 ..

단풍여자 고등학교/윤동재

단풍여자고등학교/윤동재 어느 시도에 있는지 아는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한 여자고등학교 교장선생님 어느 해 가을 아침 직원조회 때 마이크를 잡고 오랜만에 한 말씀 하시기를,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교정에 떨어져 있는 단풍을 누구도 쓸어 담지 마시오 나무에 붙어 있는 단풍이든 땅에 떨어진 단풍이든 단풍 한번 눈여겨보지 않은 학생이 어머니가 되거나 세상을 이끌어나가는 지도자가 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하고 등골이 오싹해요 교장선생님 말씀을 단풍들도 전해들었다는 말일까 그해 가을 우리나라의 단풍들이 모두 그 여자고등학교로 몰려 들었습니다 그 바람에 그 여자등학교는 단풍여자고등학교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단풍여자고등학교라 불리고 있습니다 * * * 너무 천연덕스러워서 어디 ' 단풍' 이라는 지명이 있고 정말 단풍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