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끝물/ 안미옥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무중력 공간에 두 눈을 두고 온 사람처럼
무엇을 보려고 해도
마음만큼 볼 수 없어서
그렇게 두 손 두 발도
전부 두고 온 사람으로 있다고 한다면
쓰지 않는 시간을 겪고 있다고 한다면
이해가 될까
이제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한 껏 울창해져서
어김없이 돌아오는 여름
불행과 고통에 대해선 웃는 얼굴로밖에 말할 수
없어서
아무말도 하지 않기로 다짐한 사람
절반쯤 남은 물통엔 새의 날개가 녹아 있었다
걸을 때마다 여름열매들이 발에 밟혔다
언제부터 열매라는 말에
이토록 촘촘한 가시가 들어 있었을까
다정한 얼굴
녹아버리는 것
밟히는 것
그 해의 맨 나중에 나는 것
우는 사람에게 더 큰 눈물을 선물하고 싶다
어떤 것이 자신의 것인지 모르게
1984 경기 안성
2012 동아일보 신춘
시집: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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