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여름 끝물/ 안미옥

생게사부르 2020. 8. 29. 09:55

여름 끝물/ 안미옥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무중력 공간에 두 눈을 두고 온 사람처럼

무엇을 보려고 해도

마음만큼 볼 수 없어서

 

그렇게 두 손 두 발도

전부 두고 온 사람으로 있다고 한다면

 

쓰지 않는 시간을 겪고 있다고 한다면

이해가 될까

 

이제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한 껏 울창해져서

어김없이 돌아오는 여름

 

불행과 고통에 대해선 웃는 얼굴로밖에 말할 수 

없어서

아무말도 하지 않기로 다짐한 사람

 

절반쯤 남은 물통엔 새의 날개가 녹아 있었다

 

걸을 때마다 여름열매들이 발에 밟혔다

언제부터 열매라는 말에

이토록 촘촘한 가시가 들어 있었을까

 

다정한 얼굴

녹아버리는 것

밟히는 것

 

그 해의 맨 나중에 나는 것

 

우는 사람에게 더 큰 눈물을 선물하고 싶다

어떤 것이 자신의 것인지 모르게

 

 

 

1984 경기 안성

2012 동아일보 신춘

시집: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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