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준 한 뼘의 해안선 김해준 한 뼘의 해안선 마른 국화를 태워 연기를 풀어놓는다. 꽃잎이 불씨를 타고 오그라든다. 별들로 판서된 역사가 쇠락한 하늘 아래, 야경꾼의 홍채에선 달이 곪아간다. 통금의 한계에 닿아 부서지는 경탁 소리가 시리다. 첫 기제의 밤이 젖어간다. 된서리 맞고 실밥 모양으로 주춤주춤.. 시로 여는 일상 2017.12.05
이규리 석유 냄새 때문에 이 규리 석유 냄새 때문에 오래된 난로 피울 때 진동하는 석유 냄새가 오히려 사람들을 붙들어 놓고 있다 처음에는 냄새를 밀어내려 문을 열기도 하고 심지를 올렸다 내렸다 해보지만 석유 냄새는 추위와 추위를 못 견디는 사람 사이에 엉겨 붙어 있다 사람들은 냄새를 밀어 내려다 어느.. 시로 여는 일상 2017.12.04
김해준 석유풍로 김해준 석유풍로 심지에 성냥불을 붙이면 검은 연기와 함께 석유 냄새가 올라온다. 그을음을 먹은 풍로는 비린 향을 품고 내가 지나온 공간의 한편에 자리 잡는다. 불꽃을 품고 배경을 흔드는 등으로, 또는 쌀 두 홉을 안치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의 그림자로 어른거린다. 허기진 사람의.. 시로 여는 일상 2017.12.03
장옥관 꽃잎 필 때 장옥관 꽃잎 필 때 사람의 몸에서 향기가 날 때가 있다 둥근 사람은 둥글레 향기, 모가 난 사람은 모싯대 향기, 저마다의 빛깔과 향기로 다가 올 때 가 있다 쫓기다 쫓기다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다고 생각 될 때, 뒤돌아 자기를 가만히 풀어 놓으면, 시간의 고랑을 타고 찰찰 흐르는 물 소.. 시로 여는 일상 2017.12.02
천수호 환생의 조건, 억측의 세가지 공법 천수호 환생의 조건 고흐는 씨 뿌리고 나는 수확한다 고흐가 파묻은 씨앗에 물 주지 않은 것에 반성하는 이상한 꿈을 지나 내가 축낸 이십일 세기의 노오란 햇살 한 두름을 지나 사치와 허영의 시간을 지나 찬양 받은 그의 한쪽 귀와 말라붙은 물감 밭을 일궈내어 내 잠의 깊이만한 뿌리를.. 시로 여는 일상 2017.12.01
천수호 인기척, 육친과 육류사이 천수호 육친과 육류사이 육필 원고 청탁서를 받고 모처럼 만년필로 시를 옮겼다 언재 묻었는지 퍼런 핏줄의 잉크가 손에 번져 있다 육필이라는 말의 피맛과 피냄새처럼 다정하면서도 섬뜩한 육(肉)! 이란 놈은 몸,피,살을 모두 포함하는데 문득 떠 오른 두 낱말 육친과 육류 육친에는 피맛.. 시로 여는 일상 2017.11.30
최승자 외롭지 않기 위하여 최승자 외롭지 않기 위하여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밥을 많이 먹습니다 괴롭지 않기 위하여 술을 조금 마십니다 꿈꾸지 않기 위하여 수면제를 삼킵니다. 마지막으로 내 두뇌의 스위치를 끕니다 그러면 온 밤내 시계 소리만이 빈 방을 걸어다니죠 그러나 잘 들어 보세요 무심한 부재를 슬퍼하.. 시로 여는 일상 2017.11.29
박흥식 또 다른 꽃들 박흥식 또 다른 꽃들 창의 햇볕을 가린다고 잘라낸 자리로 물 오르는 소리 눈물일는지 그래도 화신은 난만할는지 꽃 망울은 온밤을 시끄럽혔다 발을 저는 까마귀, 타다 남은 타이어, 동공 가득 퍼지던 끄름, 지난 여름 칼집 아래 꿈뻑이던 잉어 눈, 소주병 조 각이 새살 속으로 파고 들었다.. 시로 여는 일상 2017.11.27
복효근 호박오가리 복효근 호박오가리 여든일곱 그러니까 작년에 어머니가 삐져 말려주신 호박고지 비닐봉지에 넣어 매달아놨더니 벌레가 반 넘어 먹었다 벌레똥 수북하고 나방이 벌써 분분하다 벌레가 남긴 그것을 물에 불려 조불조불 낱낱이 씻어 둘깻물 받쳐 다진 마늘 넣고 짜글짜글 조렸다 꼬소름하.. 시로 여는 일상 2017.11.27
박흥식 생의 한 단계 위를 다스리는 것들 박흥식 생의 한 단계 위를 다스리는 것들 좋아했던 그 여자애가 살던 그 옛집을 찾아가 오래 바라보다 천천히 돌아서렬 때 그 애를 똑 같이 닮은 작은 애가 흘기듯 사람을 올려다보 고 세차게 철대문을 닫는 그곳 어머니 또래의 겸손한 노인에게 자리를 내어주자 애타게 부끄러운 모습으.. 시로 여는 일상 2017.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