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호
육친과 육류사이
육필 원고 청탁서를 받고
모처럼 만년필로 시를 옮겼다
언재 묻었는지 퍼런 핏줄의 잉크가 손에 번져 있다
육필이라는 말의 피맛과 피냄새처럼
다정하면서도 섬뜩한
육(肉)! 이란 놈은
몸,피,살을 모두 포함하는데
문득 떠 오른 두 낱말 육친과 육류
육친에는 피맛이 나고 육류에는 살맛이 난다
피맛은 맛보다는 농도가 우선이고
살맛은 맛이 우선이다
이 육덩어리는 어디에 달라붙느냐에 따라
악성도 되고 양성도 된다
열 여덟 딸은 꼭 악성 종양 같다던 누군가의 말에
나는 내 딸의 과육(果肉)을 와작,
씹다가 혀를 깨문다
피맛인지 살맛인지 모를 과육의 맛
피와 살과 과육
그 어느 것도 뱉어버릴 수 없어
피맛과 살맛이 뒤섞인 과육을
꿀꺽, 삼킨다
인기척
갓 결혼한 신부가 처음 여보,라고 부르는 것처럼
길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 불쑥 봉분 하나 나타난다
인기척이다
여보,라는 봉긋한 입술로
첫 발음의 은밀함으로
일가를 이루고자 불러 세우는 저건 분명 사람의 기척이다
기어코 여기 와 누운 몸이 있었기에
뒤척임도 없이 저렇게 인기척을 내는 것
새 신부 적 여보, 라는 첫 말의 엠보싱으로
저기 말랑히 누웠다 일어나는 기척들
누가 올 것도 누가 갈 것도
먼저 간 것도 나중 간 것도 염두에 없이
지나가는 기척을 가만히 불러 세우는 봉분의 인기척
1964. 경북경산
2003.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2009. 민음사)
우울은 허밍(2014. 문학동네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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