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희 수박이 아닌 것들에게 수박이 아닌 것들에게 한영희 여름이 아닌 것들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얼어 붙은 강, 누군가와 마주 잡은 손의 온기, 창문을 꼭꼭 닫아 놓고서 누운 밤, 쟁반 가득 귤껍질들이 말라가는 것을 좋아한다 여름은 창을 열고 나를 눅눅하게 만들기를 좋아한다 물이끼처럼 자꾸 방 안에 자라는 냄.. 시로 여는 일상 2018.09.10
최문자 꽃은 자전거를 타고 최문자 꽃은 자전거를 타고 그녀가 죽던 날 꽃은 자전거를 타고 왔다 그녀의 남자가 입원실 현관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막 아네모네 꽃을 내리려고 할 때 그녀의 심장은 뚝 멎었다 꽃은 다시 자전거를 타고 영안실 근처로 갔다 죽을 자리에서도 타오른다는 아네모네가 놀란 자전거를 타고.. 시로 여는 일상 2018.09.08
성윤석 해파리 해파리 성윤석 해월海月이라고도 불렀답니다. 바다의 달, 정약 전은 유배지에서 얼굴과 눈도 없이 치마를 드리워 헤엄을 친다고 기록하고 있습죠. 달이 치마를 드리워 세상의 사람을 어디론가 어디론가 알 수 없는 이끌림과 당김을 향해 가게 하듯이 오롯이 바다가 뒤집어져야 해파리떼.. 시로 여는 일상 2018.09.07
성윤석 오징어 성윤석 오징어 선동이란 말은 배에서 바로 얼렸다는 거다 집어등 을 달고 바다로 나가는 오징어잡이 배들은 불빛을 보고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 오징어 떼들을 보 면 환장한 슬픔이 거기에 있다는 거다 바닷속을 다 뒤져도 없을 밝고 희고 눈부신 꽃들이 바닷속에서 휘날린다는 거다 .. 시로 여는 일상 2018.09.06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개 박장호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개/ 박장호 내 시 속엔 시인이 없지만 자살한 시인이 행간을 걷는다고 나는 써보는 것이다. 인간은 상상을 하는 동물이어서 그가 죽기 전의 시인인지 죽은 후의 시인인지 매몰찬 독자는 내게 물을 것이다. 인간은 말을 꾸미는 동물이기도 해서 걷는 시인의 죽음도 .. 시로 여는 일상 2018.09.04
강미정 등 뒤에서 등 뒤에서 강미정 허공에 꽃잎 무늬 씻은 듯 사라진 빗물 잡힌 땅을 비켜서 갔다 밤비는 불빛이 있는 곳에서만 내렸다 겹겹 쌓인 꽃잎처럼 비는 내렸다 불빛 펄럭이던 도시가 하나씩 지워졌다 쓱, 지워 내지 못한 허기와 눈물을 좁은 화단 구석에 게워냈다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갸날픈 꽃.. 시로 여는 일상 2018.09.02
민왕기 시인의 멱살 민왕기 시인의 멱살 거만의 멱살을 잡으려다 그만 시인의 멱살을 잡고 말았다 시원하게 생긴 얼굴, 이미 용서가 들어있어 단추가 떨어지고 옷이 찢긴 후 시인의 옆에 앉아서 울었다 그 밤의 일은 시의 멱살을 잡아보려 던 일 화를 내고 나서야 그만 울음의 멱살을 잡힌 것처럼 외로 웠다 .. 시로 여는 일상 2018.08.31
안도현 닭개장 닭개장 안도현 아버지는 우물가에서 닭모가지를 비틀고 어머니는 펄 펄 끓는 물을 끼얹어 닭의 털을 뽑았습니다. 장독대 옆 참나리가 목을 빼고 닭볏 같은 꽃을 들이밀 고 바라보던 여름이었습니다 나리꽃 꽃잎에 버둥대던 닭의 피가 몇방울 튀어 묻은 듯 아린 점들이 여럿 박혀 있었습니.. 시로 여는 일상 2018.08.30
백석 산山비, 이시영 귀가, 복효근 따뜻한 외면 짧은 시 세 편 산山 비/ 백석 산山 뽕닢에 빗방울이 친다 멧비둘기가 난다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멧비둘기 켠을 본다 귀가/ 이시영 누군가의 구둣발이 지렁이 한 마리를 밟고 지나갔다 그 발은 뚜벅뚜벅 걸어가 그들만의 단란한 식탁에서 환히 웃고 있으리라 지렁이 한 마리가 포도에서 으깨어진 머리를 들어 간신히 집쪽을 바라보는 동안 따뜻한 외면 / 복효근 비를 그으려 나뭇가지에 날아든 새가 나뭇잎 뒤에 매달려 비를 긋는 나비를 작은 나뭇잎으로만 여기고 나비 쪽을 외면하는 늦은 오후 * * * 소품 같은 짧은 시도 얼마든지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됩니다. 갑자기 들이치는 비에 반응하는 멧비둘기와 자벌레를 스냅사진 찍듯 순간적으로 포착하면서 자연풍경을 간결하게 표현해 낸 속에 먹이 사슬에 의해 살고 죽는.. 시로 여는 일상 2018.08.28
강미정 울음이라는 현 강미정 울음이라는 현 혼자 베란다에 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의 등을 본다 연기로 뿌예진 등 안쪽에는 그가 써먹지 않는 울음이라는 현이 떨고 있을까 혼자 담배를 피우며 허공을 볼 때마다 가장 낮은 음으로 침묵처럼 떨고 있을 그의 울음이라는 현, 요즘은 소리내어 펑펑 울 곳도 없.. 시로 여는 일상 2018.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