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1052

김은령 능소화는 또 피어서

능소화는 또 피어서/ 김은령 저것 봐라 화냥화냥 색을 흘리며 슬쩍 담 타넘는 품새라니 눌러 죽인 전생의 내 본색이 살아서 예까지 또 왔다 능소凌宵 능소凌宵, 아무리 우겨보아도 결국 담장 아래로 헛헛이 지고 말 운명이면서 다시 염천을 겁탈하는 꽃 눈멀어 낭자히 통곡하는 누대의 습생 - 시집『잠시 위탁했다』 (문예미학사, 2018) 김선우는 에서 “이글거리는 밀랍 같은, 끓는 용암 같은, 염천을 능멸하며 붉은 웃음 퍼올려 몸 풀고 꽃술 달고 쟁쟁한 열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능소야 능소야”라면서 붉디붉은 징을 떠올린다. 정끝별은 에서 “오뉴월 불 든 사랑을 저리 천연스레 완성하고 있다니!”라고 경탄했다. 문성해의 는 “우툴두툴한 늑골이 어느새 고사목이 되어도 해마다 여름이면 발갛게 볼우물을 패는 꽃이 있다”며..

김신용 환상통

환상통(幻想痛)/김신용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나무도 환상통을 앓는 것일까? 몸의 수족들 중 어느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듯한, 그 상 처에서 끊임없이 통증이 베어 나오는 그 환상통, 살을 꼬집으면 멍이 들 듯 아픈데도, 갑자기 없어져 버 린 듯한 날 한때, 지게는, 내 등에 접골된 뼈였다 本質의 단단한 이질감으로, 내 몸의 일부가 된 등뼈. 언젠가 그 지게를 부수어버렸을 때, 다시는 지지 않겠다고 돌 로 내리치고 뒤돌아섰을 때 내 등은. 텅 빈 공터처럼 변해 있었다 그 공터에서는 쉬임없이 바람이 불어왔다 그런 상실감일까? 새가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떨리 는 것은? 허리굽은 할머니가 재활용 폐품을 담은 리어카를 끌고 골목길 끝으로 사라진다 발자국은 없고, 바퀴 자국만 ..

김수영 죄와 벌

죄와 벌/ 김수영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펜네를 때려 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사십 명 가량의 취객들이 모여 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 아니 그 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 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1963. 10 * * * 지난 번, 김수영 시인이 ' 여펜네' 로 지칭했던 김현경 여사가 진주행사에 와서 사인회 하는 모습의 사진을 누군가 올렸더랬습니다. '92세' 라는데 정정해 보이시고 고와 보였습니다. 동시에 김수영 시인이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로 돌아가실 때가 '47세'였으니... 남편보다 거의 2배 사셨다는 생각도 ..

신영배 물과 할머니

신영배 물과 할머니 문장 속으로 몸을 집어넣는 할머니는 자꾸 단어를 까먹어서 문장이 점점 쪼그라들었다 목이 타는 날은 집 안에 있는 모든 물을 틀어 놓았다 몸이 물에 불어서 문장은 넘쳤다 끓여도 끓여도 익지 않는 문장을 찔러보고 찔러보고 붉은 색에서 검은 색으로 몸이 변할 때 사이렌이 울리자 할머니도 울었다 보자기에 물을 싸도 싸도 새기만 하는 사정 문장은 힘이 빠졌다 집구석을 빠져나갔다 비가 할머니의 옷을 벗겼다 벗겨지는 문장이 할머니는 좋았다 욕을 퍼부어도 꽃들이 웃었다 소녀들이 까르르 물결을 일으켰다 할머니는 물결을 뒤집어 썼다 가슴에서 주름이 반짝였다 여자들이 굽이치며 웃었다 할머니도 굽이쳤다 골반과 닭다리가 휘어졌다 강을 따라가는 문장도 좋았다 돌아오는 길도 있었다 해진 두 발은 맨 나중에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