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이영광 달 이영광 아버지, 속 아프고 어지러운데 소주 마셨다. 마셔도 아 프다 하면서 마셨다. 한 해에 한 사흘, 마셔도 많이 아프면 소주병 문밖에 찔끔 내놓았다. 아버지 쏟고 싶은 건 다 쏟 고 살았다. 망치고 싶지 않은 것 다 망치고 살았다. 그러다 하루 소주 한 됫병으로 천천히, 자진했다. 조.. 시로 여는 일상 2018.09.22
박소유 어두워서 좋은 지금 박소유 어두워서 좋은 지금 처음 엄마라고 불렸을 때 뒤꿈치를 물린 것 같이 섬뜩했다 말갛고 말랑한 것이 평생 나를 따라온다고 생각하니 어디든 도망가고 싶었다 너무 뜨거워서 이리 들었다 저리 놓았다 어쩔줄 모르다가 나도 모르게 들쳐 업었을 거다 아이는 잘도 자라고 세월은 속절 .. 시로 여는 일상 2018.09.21
김경후 불새처럼 김경후 불새처럼 나는 많이 죽고 싶다, 봄이 그렇듯, 벌거벗은 나무에 핀 벚 꽃과 배꽃이 그렇듯, 너무 많이 죽어 펄럭이고 싶다, 파 도치고 싶다, 세상 모든 재와 모래를 자궁에 품고, 잿더 미의 해일도 일으켜 보자,죽음보다 더 많이 죽어보자, 살 과 소음, 그런거 말고, 삶과 소식들, 그런 .. 시로 여는 일상 2018.09.20
박소유 원탁회의 원탁회의 /박소유 동그란 결론을 내자는 뜻이지요 한 명이라도 딴소리하면 옆으로 새는 혓바닥처럼 일그러지는 둥근 탁자 맞은 편에 앉은 저 사람은 사랑이라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 같군요 중요한 건 정색을 하고 앉은 사람들 틈에 있으면 나는 왜 이렇게 시시껄렁해질까요 터져 나오는 웃음처럼 동그라미를 치고 밑줄을 긋고 리듬도 없이 시간은 흘러가네요 이토록 많은 말이 필요한 건지 입을 다물면 금방 큰일 날 것처럼 한마디 하라고 재촉하는 사람들 입을 맞추자는 것이지요 오! 오! 동그랗게 오므린 입술만 내밀면 비로소 하나가 되어 있겠네요 우리는 금방 헤어질 사람들인데 금방 다시 만날 사람처럼 왜 이렇게 다정해 지려고 하는 걸까요 * * * 원탁회의든 사각회의든 ' 우리는 금방 헤어질 사람들인데 금방 다시 만날 .. 시로 여는 일상 2018.09.19
이규리 껍질째 먹는 사과 이규리 껍질째 먹는사과 껍찔째 먹을 수 있다는데도 사과 한입 깨물 때 의심과 불안이 먼저 씹힌다 주로 가까이서 그랬다 보이지도 않는 무엇이 묻었다는 건지 명랑한 말에도 자꾸 껍질이 생기고 솔직한 표정에도 독을 발라 읽곤 했다 그건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라 전례가 그렇다는.. 시로 여는 일상 2018.09.16
김경후 외벽방 김경후 외벽방 비 내리는 밤 외벽방 너무 삶은 국수 가닥 같은 여자 밤과 비 사이 외벽방 풀어헤친 백발로 짰다 풀었다 다시 짜는 여자의 뜨개질 잠들지 못하는 누에 울음 우는 여자 빗소리 흐르는 외벽방 계단도 추락도 없이 밤, 외벽방 사진 : 에드워드 호퍼 그림 시로 여는 일상 2018.09.15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이수명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이수명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나 많은 손들이 있고 나는 문득 나의 손이 둘로 나뉘는 순간을 기억한다. 내려오는 투명 가위의 순간을 깨어나는 발자국들 발자국 속에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발자국에 맞서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이 있고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육체가 우리에게서 떠나간다 육체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가 돌아다니는 단추들 단추의 숱한 구멍들 속으로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시로 여는 일상 2018.09.14
장석남 얼룩에 대하여 장석남 얼룩에 대하여 못 보던 얼룩이다 한 사람의 생은 이렇게 쏟아져 얼룩을 만드는 거다 빙판 언덕길에 연탄을 배달하는 노인 팽이를 치며 코를 훔쳐대는 아이의 소매에 거룩을 느낄 때 수줍고 수줍은 저녁 빛 한 자락씩 끌고 집으로 갈 때 千手千眼의 노을 든 구름장들 장엄하다 내 생.. 시로 여는 일상 2018.09.13
김경후 입술 입술 김경후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겹 주름진 절벽일 뿐 그러나 나의 입술은 지느러미 네게 가는 말들로 백만겹 주름진 지느러미 네게 닿고 싶다고 네게만 닿고 싶다고 이야기하지 내가 나의 입술만을 사랑하는 동안 노을 끝자락 강바닥에 끌리는 소리 네가 아니라 네.. 시로 여는 일상 2018.09.12
자주 틀리는 맞춤법 한영희 자주 틀리는 맞춤법 한영희 일기 속에 오늘을 틀리게 써넣었다. 언니는 자주 모서리에 부딪친다 나는 현명 하다 골목은 흔한 배경이다 옆집 개는 죽는다 똥개야 살지 마 언니야 던지지 마 휘갈겨 쓴 문장들을 언니는 몰래 훔쳐 읽었다. 그리고 화를 냈다. 낮은 계단에게 나, 새는 물컵에게.. 시로 여는 일상 2018.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