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1052

나의 아름다운 방/신영배

나의 아름다운 방/ 신영배 오후 두 시 방향으로 나는 상자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얇게 접어 둔 다리 의자는 새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앉아 있던 잠이 툭 떨어져 내린다 의자가 쓰러지고 새가 아름답게 나는 방 오후 네 시 방향으로 나는 물병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흠뻑 젖은 주둥이로 다리를 조금 흘린다 관 뚜껑을 적시는 문장 화분은 고양이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깨진 고양이가 내 손등을 할퀸다 씨앗이 퍼진다 갈라진 손등에 고양이를 묻고 해 질 녘 손의 음송 오후 여섯시 방향으로 나는 기다란 악기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붉은 손가락으로 관 속의 다리를 연주한다 커튼은 물고기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젖히자 출렁이는 강물 속 내 다리가 아름답게 흐르는 방 - 오후 여섯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중에서

신영배 물모자를 쓰고

물모자를 쓰고/신영배 나는 물모자를 쓰고 거짓말을 했다 나의 바구니에는 사과가 가득 사과는 속이 썩어 있었다 맛있는 사과 사과 사세요 사과 사세요 나는 물모자를 쓰고 사과는 시간 하루 벌어 하루 실패하는 때가 많다 유모차를 끄는 엄마에게 빨간색 핸드백을 멘 아가씨에게 빨간색 사과는 빛 등 뒤에서 나무가 물모자를 흔들었다 아침에 지나간 여자가 저녁에 찾아왔다 사과를 반으로 쪼개 보이며 썩 썩 썩 썩었잖아요 나는 물모자를 쓰고 소녀 얼굴이 빨개지고 다시 맛있는 사과 사과 사세요 사과 사세요 썩은 사과를 쪼갠 바람이 밤과 함께 찾아왔다 어 어 어 어쩌라고요 나는 바구니를 엎고 소리를 질렀다 사과가 흩어지고 사과는 시간 검은 물방울이 벌어지기도 하는 나는 물모자를 쓰고 할머니 초승달이 떴다 사과는 빛 물모자가 ..

돌에 물을 준다 이선자

돌에 물을 준다/ 이선자 돌에 물을 준다 멈춘 것도 같고 늙어가는 것도 같은 이 조용한 목마름에 물을 준다 이끼 품은 흙 한덩이 옆으로 옮겨 온 너를 볼 때마다 너를 발견했던 물새우 투명한 그 강가의 밤 이슬을 생각하며 내가 먼저 목말라 너에게 물을 준다 나를 건드리고 지나가는 것들을 향해 손을 내 밀수도 없었고 뒤돌아 볼수도 없었다. 나는 무거웠고 바람은 또 쉽게 지나갔다 움직일 수 없는 내게 바람은 어둠과 빛을 끌어 주었다 때로 등을 태워 검어지기도 했고 목이 말라 창백해지기도 했다 아무하고도 말을 할 수 없을 때, 긴 꼬챙이 같은 가슴을 뚫고 오는 빗줄기를 먹고 살았다 아픔은, 더더구나 외로움 같은 건 나를 지나는 사람들 이야기로만 쓰여졌다 나는 몸을 문질렀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숨소리도 없이 몸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