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1052

박준 환절기

환절기 / 박준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 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 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바퀴나 돌다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 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 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 는그 축농(蓄膿)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어보았다 * * * 문정희 시인은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면서도 ' 무더운 여름 일찍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

이수명 최근에 나는

이수명 최근에 나는 최근에 나는 최근 사람이다. 점점 더 최근이다. 최근에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는 사람들 앞을 지나갔다. 어디서 오는 길이지요 묻는 사람은 최근에 본 사람이고 펄럭이는 플래카드 텅 빈 플래카드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 았다. 나는 펄럭이는 깃발 아래 펄럭이는 그림자를 최근 에 본 사람이고 그 펄럭이는 것이 신기하게도 구겨지지 않고 계속 펄럭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구 겨지지 않는 사람들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혹은 구겨 진 신체를 계속 펴는 사람들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는데 아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다만 펄럭이는 것이 아무것 도 쓰여 있지 않으려 펄럭이는 것이 가로 지르고 있는 최 근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었다. 수시로 아침이 오려 하는 거리를 신체를 펴고 걸어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