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한영미 이상한 나라 앨리스, 굴레방 다리

생게사부르 2020. 11. 28. 10:21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한영미

 

 

 

라면으로 첫 끼니를 때운다

 

바닥엔 파지처럼 굴러다니는 쓰다만 이력서들

 

열정 하나로 통했던 시대는 갔다

 

모래 수렁을 떠도는 비문의 유령들,

 

오늘은 이 회사에서 내일은 저 회사에서

 

같은 얼굴을 만나고도 기억하지 못한다

 

모래바람은 깊은 수렁을 덮기도 하고 만들어내기도 한다

 

빠져나오려는 안간힘은 처음 몇 번의 좌절이면 족했다

 

움직일수록 흘러내리는 모래의 깊이는

 

늪처럼 빠져들고, 바닥처럼 측량되지 않는다

 

입구가 사라지는가 하면 출구가 봉합되기도 한다

 

수렁이 무덤이 되는 것은 한순간,

 

어제도 국화 한 송이를 놓고 왔다

 

가수와 진수가 구별되지 않는 교묘함에도

 

구덩이를 채운 숫자는 갈수록 넘쳐난다

 

무릎이 튀어나온 츄리닝, 쌓여가는 빈 소주병이

 

발굴된 유물의 전부가 될 것이다

 

전화 한 통이면 빠져나올 수 있는 꿈이면 좋겠다

 

남은 국물에 식은 밥 한 덩이 말아 시어 빠진 김치 쪼가리로

 

후르륵 위장을 채운다

 

내비게이션 토끼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낯선 얼굴들이 모래 수렁에서 길을 찾고 있다

 

 

 

 

굴레방다리/ 한영미

 

 

 

아현동 굴레방다리 하면 목줄이 떠오른다

 

둥근 모양이 세 개나 들어가는 아현동이란 지명이

 

입 벌린 사람들의 모습 같아서, 그들의 허기진 뱃속 같아서,

 

소가 벗어놓고 와우산으로 누웠다는 굴레가

 

골목 어디쯤에선가 나타나

 

기다렸단 듯이 목을 거칠게 잡아챌 것만 같은 동네

 

흑백 사진 속 배경으로 만나는 그곳에서

 

부모님의 목줄 덕으로 어렵게 대학까지 마쳤다

 

가난은 꿈도 사치라는 말을 배웠지만

 

철수된 고가 다리처럼 빠져나와 모두가 잘살고 있다

 

날마다 걷던 웨딩드레스 거리는 왜 그렇게도

 

퇴락한 슬픔이었는지,

 

조화롭지 못한 방석집과 한데 나열되어

 

흰빛이 눈처럼 순백색이 아닌 술집 여자들의 덧칠된 화장처럼

 

이물스러웠던 기억

 

밀폐된 어둔 공간을 찾아들던 검은 양복 입은 남자들의 술 취한 모습과

 

그들의 손을 잡아끌던 눈빛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이 화려한 여자들과 마주칠 때면

 

그녀들이 입을 먼 미래의 웨딩드레스가 궁금해지곤 했다

 

눈부신 조명 아래 여전히 웨딩 타운으로 화려한 동네

 

이따금 생각나는 곳이지만 그와 동시에 목부터 죄어드는 곳,

 

모두가 치열했던 시절이 재개발된 모습으로 지워졌다

 

하지만 아현동 굴레방다리란 발음 속에서 여전히 되살아나는

 

허기와 굴레

 

 

 

                   2019. 봄호 시산맥 신인 시 문학상

 

 

*        *        *

 

 

한영미 시인

서울 출생이지만 영등포구 출신이라고 어디서 읽은 듯

시산맥 신인 시 문학상으로 등단하고 이어 영주문학 신인상도 있던데

시를 오래 쓰며 내공을 닦은 듯 합니다.

 

 

역사를 배우고 가르쳤으니

삼국 통일 후 성덕왕 , 조선 세종, 영 정조 임금 통치시기' ' 태평성대' 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긴 역사에 비하면 정말 잠깐, 짧은 순간이었고 대부분의 시절이 ' 난세' 였음을 압니다.

꼭 직접적으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꿈을 갖기 어려운 젊은이들의 실업이나 미취업이 코로나로 인해 더 움츠려 들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와의 전쟁이니 

 

' 움직일수록 흘러내리는 모래의 깊이는

늪처럼 빠져들고, 바닥처럼 측량되지 않는다

입구가 사라지는가 하면 출구가 봉합되기도 한다

수렁이 무덤이 되는 것은 한순간,

어제도 국화 한 송이를 놓고 왔다'

 

위 문장은 코로나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네요.

 

 

' 아현동 굴다리 역시

 

오육십대 이상 여성이라면 직접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오며가며 관심만 있다면

그냥 스치지는 않았을 풍경들,

영등포, 아현동 같은 단어만으로도 거기서 살았던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힘겨웠던 삶...

 

자칫 무거웠을 시를 제목 앨리스나 비게이션 토끼, 웨딩드레스, 웨딩타운 같은 단어가 좀 가볍게

좀 더 젊게, 현대적으로 이끈 것 같습니다.

 

저도 최근 도시탐방하면서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아직도 일부 남아 있는 마산 집창촌.. 차마 대 놓고 찍지 못하고 엇 비슷하게 찍었습니다만 

 

한 때 ' 신이 포기한 동네' 라는 닉 네임을 가졌던 신포동입니다

신은 제 임의대로 가져다 쓰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니 교회나 성당이나 마찬가지로

사람 사는 곳에서 마음을 두면 어디나 있다는 점에서는 공평하네요.

 

몇년 전까지 마산 최고의 아파트, 삼면으로 바다가 보여 살고 있는 동안 리조트 와 있는 것 같은

' 아이파크' 까지 있는데... 

 

 

 

 

 

 

 

 

 

 

'시로 여는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앵두의 폐사지/ 박은형  (0) 2020.12.04
거꾸로 일력/ 김예하  (0) 2020.12.01
각시거미/ 이삼현  (0) 2020.11.22
옛, 성윤석  (0) 2020.11.18
아무나 씨에게 인사/ 김희준  (0) 2020.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