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기형도 봄날은 간다

생게사부르 2019. 5. 13. 07:32

봄날은 간다/ 기형도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 반 시외버스도 떠난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 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 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 들어 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 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의 삶

 

 

*     *      *

 

 

봄날은 이미 갔고

해 뜨면 여름으로 들어서는 날씨입니다

 

' 봄날은 간다' 는 시가 하도 많아서

원조가 누구일까 잠시 궁금했는데

누구나가 느끼는 감정이면 원조가 아닌들 뭐 어떠랴 싶네요

 

안도현시인의 ' 봄날은 간다'에서는

 

 ' 늙은 도둑놈'이 기억에 남던데...

 

늙은 도둑놈처럼 시커멓게 생긴

보리밭가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는 살구나무에 꽃잎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고나면

살구나무 가지마다 다닥다닥

누가 꽃잎을 갖다 붙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데 없는 일을 하는

그가 누구인지

.

어느 날 들판 한 가운데

살구나무에다 돛을 만들어 달고

떠나려는 한 척의 커다란 범선

.

어서가서 저 배를 밀어 주어야

하나 저 배 위네 나도 훌쩍 몸을

실어야 하나

 

 

꼭 살구나무 아니어도

수령이 오래 된 나무들

대추나무나 석류나무가 시꺼매서 죽었나

싶었는데 또 파릇한 싹이 올라오는 걸 여러 해 보면서

그 시커먼 고목에 아리도록 연한 새순이라니

'도둑놈' 이란 표현이 딱 맞아떨어지네요

다닥다닥 꽃잎을 갖다 붙여

어느 날 보니

한 채 범선이 떠 있어요

저 배에 올라타야 하나 ...

 

 

아마 백설희씨 노래가 원조일지

 

"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 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들던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

 

 

음악을 좋아한 아버지 덕분인지

은연 중 흘러간 옛노래를 모르는 게 없더군요

그러나 의식적으로 익힌 게 아니니

가사는 모르는 채 리듬만 흥얼거리는 거지요.

 

사실은 시는 그 가사인데요.

 

트롯곡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주변에서

' 미스 트롯' 이라는 프로 얘기를 듣습니다.

 

' 내 시가 딱 노래가사로 불리면 만족' 이라는 분도 있고요

 

김택근 시인 ' 봄날은 간~다'에서는 이렇게 얘기하네요

 

 

꽃이 피어올라오는 속도로 봄은 또 그렇게 가고 있다

' 봄날이 간다' 노랫말이 가슴으로 스며들 때면 우리네 삶은 봄날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사랑도 우정도 정범이 지나가야 제대로 보인다

 

 

기형도 시인의 봄날

 

툇마루, 신작로, 흐린 알전구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가 이제

흘러간 시대 이미지지만...

 

시 느낌은 언제나 원조 시 같습니다

시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아픔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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