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송찬호 구덩이

생게사부르 2019. 4. 24. 11:46

구덩이 / 송찬호


 

상수리 나무 숲이 시키는 대로
두 사내는 묵묵히
구덩이를 팠다

거긴 오래전부터 도적들의 숲이어서
재물을 빼앗기고
손과 발이 묶인 채
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구덩이는 금새 나무뿌리와 돌이 걷힌 다음
검은 입을 쩍 벌렸다
차 뒤 트렁크에서 피묻은 마대자루가 질질 끌려 나왔다

삶은 아름다워라!
높은 담벼락의 성에서
살짝 빠져나온 공주는
환호작약 나비 떼를 따라가는데,
세상 그 많던 돈과 보물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봐 넌 누굴 원망할 자격도 없어 게다가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비열하게 목숨까지 구걸하다니,
사내 하나가 담배 꽁초를 구덩이에 던졌다

꽃, 별, 종교, 국가.....개개끼들!
마대 자루 속 꿈틀거리는 것도
이제 최후의 발악만 남은 것 같았다
구덩이가 푸하하하 웃었다

 

 

*       *       *

 

 

' 그 질로 가서 안 온다 아이요'

 

하루 사이 깜쪽같이 사라진 사람들

어디선가 구덩이에 파 묻히기도 했고

전홧줄로 꽁꽁 묶고 돌멩이를 매달이 바다에 빠뜨리기도 했고

 

간 혹 그 구덩이가 발견되기도 하고

돌멩이가 빠져서 바다에 떠 오르기도 했지만

 

해방공간 이데올로기의 지배 논리에 의해

부도덕하던 불의에 바탕한 독재권력에 의해 자행되었던

.

.

 

이즈음은 대부분 자본의 논리에 의한 인명경시 풍조가 그  이유가 되고 있지만

하하든 ' 구덩이가 푸하하하 웃는다 '

 

 

세상이 어떻든 좀 초연하게 살고 싶지만 시인이길 선택한 이상 그 속성은 초연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시인이나 작가란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해야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게 시인의 숙명이다

 

대신 자신의 시에서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는 거, 창작하는 자의 특권일 것이다 

 

자칫 어둡고 무거워질 수 있는 내용을  밝고 환하게 만드는 시인의 전략

세상에 때 묻기 전의 동심을 불러 오는 것

동화나 우화적인 분위기로 되살려 보거나 엉뚱한 발상이나 단어를 사용해 보는 것

이를테면

 

 

님께서 새 나막신을 사 오셨다

나는 아이 좋아라

발톱을 깎고

발 뒤꿈치와 복숭아뼈를 깎고

새 신에 발을 꼬옥 맞추었다

 

 

            - 분홍 나막신-

 

 

나비는 순식간에

재크 나이프처럼

개를 접었다 펼쳤다

.

.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환한 대낮에

나비는 꽃에서

지갑을 훔쳐내었다

 

 

      - 나비 -

 

 

시교실에서 자주 하는 이야기

어린시절 그래도 시골생활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우리니까 그나마 공감을 하는 것이지

도시에서 태어나 도회적인 삶을 살아온 세대들에겐 고향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향수 말고는

전통사회에서 가져오는 소재를 통해 서정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기가 매우 어렵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4차산업을 이야기 하는 이즈음 이전 전통사회의 서정은 찾기 어려울 정도로 사회는 급변했다

도시에서 살고 있어도 어린 시절 시골에서의 생활정서를 아는 분들은 이제 늙었고 낡았다

 

시가 젊어지는 방법, 어려지는 한 방법을 시인은 찾은 듯하다

원래 나이가 들면 어린애로 돌아간다고들 하지 않던가

 

문제는 자칫 가벼워질 수 있다는 점인데

이미 젊은 시절, 시인으로서 충분히 삶의 깊이를 탐구 한 분이니

그 경계를 정하는 일, 균형을 이루는 일이 시에 무게를 더하는 관건일 듯 

 

 

분홍 나막신에서는  ' 출수 없는 춤 '이

나비에서는 ' 도대체 그에게는/ 삶에서 도망이란 없다' 같은

 

의식이나 정신이 젊은 게 시가 늙지 않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겠지만

사회문화적으로 몸 담고 살아온 시대에 따라 의식의 차이는 날 수 밖에 없는지라

사용하는 낱말, 단어라도 젊게 ? 어리게?

어디까지 어려질 것인가 ? 

 

 

 

 

송찬호 시인의 최근 모습

 

2019. 4.9 진주문고 특강

사회  문저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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