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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의 안감/정선희

울음의 안감/ 정선희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설익어 목소리가 갈라지는 울음이 있고, 색을 덧발라 속이 안 보이는 울음이 있고, 물기가 가득해서 수채화처 럼 번지는 울음이 있다는 것을 어른이 우는 모습을 본 아이는 속으로 자란다 그날 호주머니의 구멍 난 안감처럼 울음을 움켜 쥔 손아귀에서 허무하다는 걸 알아버린다 그 후 내가 만난 모든 울음은 그날 밤에 바느질된 듯 흐느끼며 이어져 있다 실밥을 당기면 주르륵 쏟아질 그날의 목록들 외할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다섯 여자가 모여 앉아 울음 같은 모닥불에 사연 하나씩 쬐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모두에게 다른 사람, 몰랐던 사람이었다 관계란 아름답지 않은 한 줄 문장 같은 것을 붙잡고 있는 것 울음은 죽은이에게 가지 않고 자신을 적신다 얼룩질 텐데 죽음을 당겨 울음의 안감..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 남 수우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 남 수우 한 사람에게 가장 먼 곳은 자신의 뒷모습이었네 그는 그 먼곳을 안으러 간다고 했다 절뚝이며 그가 사라진 거울 속에서 내가 방을 돌보는 동안 거실의 소란이 문틈을 흔든다 본드로 붙여둔 유리잔 손잡이처럼 들킬까 봐 자꾸만 귀가 자랐다 문 밖이 가둔 이불 속에서 나는 한 쪽 다리로 풍경을 옮기는 사람을 본다 이 곳이 아니길 이 곳이 아닌 나머지이길 중얼거릴수록 그가 흐릿해졌다 이마를 기억한 손이 거울 끝까지 굴러가 있었다 거실의 빛이 문틈을 가를 때 그는 이 방을 겨눌 것이다 번쩍이는 총구를 지구 끝까지 늘리며 제 뒤통수를 겨냥한다 해도 누구탓은 아니지 거울에 남은 손자국을 따라 짚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게 뒷모습을 안겨주던 날 모서리가 처음 ..

소, 호랑이/ 김기택

소/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 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뻑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호랑이/ 김기택 길고 느린 하품과 게으른 표정 속에 숨어 있는 눈 풀잎을 스치는 바람과 발자국을 빈틈없이 잡아내는 귀 코 앞을 지나가는 먹이를 보고도 호랑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위장을 둘러 싼 잠은 무거울수록..

반갑다~ 신축년~~

아듀~ 경자년 ~~ 반갑다. 신축년 ~~ 이렇게 요란스레 오더니.... 코로나로 온 지구가 , 온 나라가 상처 투성이가 된 한해였어요. 돌아가신 분들도 너무 많고, 이 지상에서 마지막 보내는 절차 사랑하는 사람들을 장례식마저 제대로 치르지 못한 가족들이 너무 많았을 것이기에 가슴 아픈 한 해입니다. 이전 페스트처럼 기록이 되겠지요. 얼마나 많은 인원이 유명을 달리했을 것인지 발로 차서라도 빨리 내 쫒고 싶은 2020년입니다. 새해는 신축년 소의 해랍니다. 내년은 상황이 좀 나아져야 할 텐데요. 소처럼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새해되시기 바랍니다.

사진 이야기 2020.12.31

이스탄불의 어린 사제/박노해

이스탄불의 어린 사제/ 박노해 폭설이 쏟아져 내리는 이스탄불 밤거리에서 커다란 구두통을 멘 아이를 만났다 야곱은 집도 나라도 말글도 빼앗긴 채 하카리에서 강제 이주당한 쿠르드 소년이었다 오늘은 눈 때문에 일도 공치고 밥도 굶었다며 진눈깨비 쏟아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작은 어깨를 으쓱한다 나는 선 채로 젖은 구두를 닦은 뒤 뭐가 젤 먹고 싶냐고 물었다 야곱은 전구알같이 커진 눈으로 한참을 쳐다보더니 빅맥, 빅맥이요! 눈부신 맥도날드 유리창을 가리킨다 학교도 못가고 날마다 이 거리를 헤매면서 유리창 밖에서 얼마나 빅맥이 먹고 싶었을까 나는 처음으로 맥도널드 자동문 안으로 들어섰다 야곱은 커다란 햄버거를 굶주린 사자 새끼처럼 덥석 물어 삼키다 말고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면 담배를 물었다 세입쯤 먹었을..

겨울 휴관/ 김이듬

겨울 휴관 / 김이듬 무대에서 내려왔어 꽃을 내미네 빨간장미 한송이 참 예쁜애구나 뒤에서 웃고 있는 남자 한때 무지 좋아했던 사람이 목사가 되었다 하네 이주 노동자 들 모이는 교회라지 하도 괴롭혀서 도망치더니 이렇게 되었구나 하하하 그 가 웃네 감격적인 해후야 비록 내가 낭송한 시라는게 성직자에게 들려주긴 참 뭐한거였지만 우린 조금 걸었어 슬며시 그의 딸 손을 잡았네 뭐가 이리 작고 부드 러울까 장갑을 빼려다 그만두네 노란코트에 반짝거리는 머리띠 큰 눈동자 는 내 눈 을 닮았구나 이 애 엄마는 아마 모를거야 근처 미술관까지 차가운 저녁 바 람 속을 걸어가네 휴관이라 적혀있네 우리는 마주보고 웃다가 헤어지려네 전화번호라도 물어볼까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할 거라하네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 ..

12월/ 김이듬

12월 / 김이듬 저녁이라 좋다 거리에 서서 초점을 잃어가는 사물들과 각자의 외투 속으로 응집한 채 흔들려 가는 사람들 목 없는 얼굴을 바라보는 게 좋다 너를 기다리는 게 좋다 오늘의 결심(決心)과 망신(亡身)은 다 끝내지 못 할 것이다 미완성으로 끝내는 것이다 포기를 향해 달려가는 나의 재능이 좋다 나무들은 최선을 다해 헐 벗었고 새떼가 죽을 힘을 퍼덕거리며 날아가는 반대로 봄이 아니라 겨울이라 좋다 신년이 아니고 연말, 흥청망청 처음이 아니라서 좋다 이제 곧 육신을 볼 수 없겠지 움푹 파인 눈의 애인과 창백한 내 사랑아 일어나라 내 방으로 가자 그냥 여기서 고인물을 마시겠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널 건드려도 괜찮지? 숨 넘어 가겠니? 영혼아, 넌 내게 뭘 줄수 있었니? - 말 할 수 없는 애인. 2..

꽃물/김필아

꽃물/ 김필아 누군가 소녀로 꽃물을 들였지 동여맨 끝이 예쁠거라며 잠이 들었어 아침에 일어나면 봉숭아들이 땅 속으로 스미는 서녘의 얼룩을 남기곤 했지 그날도 봉숭아는 피를 토하고 있었지 들숨날숨 긷는 소리에 톡톡 터지기도 했지 손목에 찬 초침도 없는 방수시계는 잘도 돌아갔지 기분과는 상관 없이 재깍재깍 돌아갔지 나는 겉돌았지 나는 시간을 빌리려 꽃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 같았지 재깍거리는 소리가 몸을 삼켜버릴 것 같았지 시계는 점점 몸이 거대해졌지 거대한 톱니바퀴가 꿈을 야금야금 깎아 먹는 것 같았지 나는 힘껏 부서져라 시계를 꽃 속으로 던졌지 불량한 계집애가 톡, 누군가 소녀로 꽃물을 들였지 나를 쿡쿡, 찧고 있었지

바위 거창 사선대, 순창 요강바위

얼마만큼의 세월을 살았을까 ? 사람은 백살 살기가 쉽지 않은데 돌멩이는 최소 천년이라든가 나무든 바위든 자연을 찾아 가는 일, 작년 시 교실 문우들과 다닌 시간 벌써 추억이 되었네요. 이 때가 코로나 막 시작할 때였는데 김** 시인의 차량제공, 운전 서비스로 거창 함양 몇 군데 둘렀습니다 유** 시인이 서부 경남 자연과 역사를 꿰고 계셔서 일반인이 잘 다니지 않는 여러 곳을 찾았습니다만 오늘은 오랜 시간(얼마일지? ) 물이 흐르면서 뚫어놓은 움푹 패인 바위를 사진으로 소개합니다. 거창 월성계곡과 순창 섬진강 장군목 유원지 있는 바위와 움푹 패인자국입니다 이런 곳에 서면 인간이 겸손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고 자연의 위대함이 경이로울 뿐입니다. 유수에의해 모래, 자갈등이 바위의 오목한 곳에 들어가 회전하..

어느 가능성/ 김필아

어느 가능성/ 김필아 돌을 들춰요 주로 돌 밑이거나 어느 틈 사이 나는 돌을 들춰야 하고 들춘 돌에서 C장조를 찾아 애인에게 줄 거예요 애인은 속눈썹을 깜박거려요 애인의 속눈썹을 들추면 푸른 밀림이 거기에 있지요 음, 아름다운 사랑이네요 라고 말했나요 날이 화창해서 잘 어울린다고 말했나요 나는 돌을 들추기 위해 윗돌을 들춰요 음표를 들춰보니 음표사이로 플라밍고가 핑크빛으로 일어요 나는 돌을 들춰야 하고, 또 나는 어느 돌 밑 보물을 찾는 사람처럼 기대해야 해요 당신 꿈을 들추고 꽃을 들추고 물방울을 들춰요. 계절병처럼 찾아 오는, 아직 찾지 못한, 원래부터 있던 쓰르라미가 작은 바람같이 우는 소리를 들춰봐요 길가의 쓰레기통 담장 밑이거나 어느 숲, 나무 구멍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병인을 앓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