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무릎이 닿는다면 이원 서로의 무릎이 닿는다면 이원 우리는 없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없는 의자와 같이 마주 앉아 있다 의자는 없고 서로 의자가 되었으므로 당신과 나 사이에는 테이블이 놓여야 하지요 테이블 아래로 밤이 자꾸 와서 당신과 나 사이가 깊어지지요 글썽이는 것들은 모두 그 곳에 묻히지요 모.. 시로 여는 일상 2018.07.11
신미나 연애 연애/ 신미나 비가 올 거라고 했고 우산을 가지고 나오겠다고 했다 당신은 우산을 척척 접은 뒤 사거리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가 횡단보도를 건널 것이다 비가 올 것 같다는 말은 어쩐지 희미해 눈을 감으면 4층에서 1층까지 차례로 전등에 불이 들어온다 티스푼으로 뜬 것 처럼 빗물이.. 시로 여는 일상 2018.07.09
비 그친 뒤 이정록 비 그친 뒤/ 이정록 안마당을 두드리고 소나기 지나가자 놀란 지렁이 몇 마리 서둘러 기어간다 방금 알을 낳은 암탉이 성큼성큼 뛰어와 지렁이를 삼키고선 연필 다듬듯 부리를 문지른 다 천둥번개에 비틀거리던 하늘이 그 부리 끝을 중심으로 수평을 잡는다 개구리 한 마리 안마당에 패대.. 시로 여는 일상 2018.07.08
천수호 아버지의 귀 거래사 아버지의 귀 거래사 / 천수호 아버지는 귀를 먼저 지우셨다 기억과 거래하는 족족 귀는 몸에서 떨어져 나와 기웃기웃 날아서 반 백 년을 도로 넘어갔다, 가버렸다 사라진 귀들, 고흐의 귀가 그랬고 윤두서의 귀가 그랬다 귀만 먼저 날아서 먼 세기로 넘어 가버렸다 귓바퀴만 남아서 헛바퀴.. 시로 여는 일상 2018.07.07
손현숙 블랙커피 블랙커피/ 손현숙 올해도 과꽃은 그냥, 피었어요 나는 배고프면 먹고 아프면 아이처럼 울어요 말할 때 한 자락씩 깔지 마세요 글쎄, 혹은 봐서, 라는 말 지겨워요 당신은 몸에 걸치는 슬립처럼 가벼워야 해요 천둥과 번개의 길이 다르듯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갈등하는 거 흙산에 들면 .. 시로 여는 일상 2018.07.06
빗방울 화석 손택수 빗방울 화석 손택수 처마 끝에 비를 걸어 놓고 해종일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나 듣고 싶다 밀린 일 저만치 밀어 놓고, 몇 년 동안 미워했던 사람 일도 다 잊고,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쫒아 다니던 밥벌이 강의도 잊고 빗방울 소리를 듣는 건 오래전 애인의 구두 굽이 길바닥에 부딪는 소리를.. 시로 여는 일상 2018.07.05
김이듬 게릴라성 호우 게릴라성 호우 / 김이듬 거리의 비는 잠시 아름다웠다 위에서 보는 우산들은 평화로이 떠가는 잠깐의 행성이 된다 곧 어마어마한 욕설이 들려오고 뭔가 또 깨고 부수는 소리 옆집 아저씨는 일주일에 몇 번 미치는 것 같다 한 여름에도 창문을 꼭꼭 닫을 수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 나는 오늘 한마디도 안 했다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마시면서 아아 했지만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는 말이 아니니까 홑이불처럼 잠시 사부작거리다가 나는 지워질 것이다 직업도 친구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훌륭하다는 생각도 했다 작은 배드민턴 라켓 모양의 전자파로 모기를 죽였다 더 죽일 게 없나 찾아 보았다 호흡을 멈추면서 언제까지나 숨 쉴 수 있다는 듯이 자정 무렵 택배 기사가 책을 갖고 왔다 그것이 땀인 줄 알면서 아직 비가 오냐고 물어.. 시로 여는 일상 2018.07.04
최은묵 땅의 문 최은묵 땅의 문 터진 신발 밑창에서 땅과 연결된 문을 발견했다 발을 움직이자 나무 뿌리 틈으로 소리들이 흘러 나왔다 발가락에 힘을 주고 지냈으니 눌린 것들의 소란은 도무지 위로 오르지 못했던 거다 나무 밑동이 전해 주는 야사野史나, 자식들 몰래 내뱉는 어머니의 한숨, 대개 이런 .. 시로 여는 일상 2018.07.02
문성해 여름꽃들 문성해 여름꽃들 사는 일이 강퍅하여 우리도 살짝 돌아버릴 때가 있지만 그래서 머릿골 속에 조금 맺힌 꽃봉오리가 새벽달도 뜨기 전에 아주 시들어버리기도 하지만 부용화나 능소화 백목일홍 같은 것들은 속내 같은 거 우회로 같은 거 은유 같은 거 빌리지 않고 정면으로 핀다 그래 나 .. 시로 여는 일상 2018.07.01
안상학 아배생각 안상학 아배생각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 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 고랑내 나는 밥상 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 니, 오늘 외박하냐? -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게 .. 시로 여는 일상 2018.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