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김수영 죄와 벌

생게사부르 2018. 7. 28. 07:34

죄와 벌/ 김수영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펜네를 때려 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사십 명 가량의 취객들이
모여 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 아니 그 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 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1963. 10

 

 

 

*     *      *

 

 

지난 번, 김수영 시인이 ' 여펜네' 로 지칭했던 김현경 여사가 진주행사에 와서 사인회 하는 모습의 사진을

누군가 올렸더랬습니다. '92세' 라는데 정정해 보이시고 고와 보였습니다.

동시에 김수영 시인이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로 돌아가실 때가  '47세'였으니... 남편보다 거의 2배 사셨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문우 중 한명이 ' 김수영 시인을 우뚝 세우는데 부인의 내조가 컸었나 보네'  하는 소리에

내조가 컸나? 아니면 시인에게 자기 모순 속에 갈등이나 자기혐오를 불러일으키는 화근(?)이 됐나?

 

다양한 정보에 의하면 시인의 부인은

'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현실적 감각과 역량'이 뛰어나 보입니다

한 마디로 시인이 시를 쓰면서 결핍되기 쉬운 현실생활을 충분히 커버하기도 했고

시인이 쓴 시에 대한 최초의 독자이자 시인이 쓴 시를 받아 적고 정서하는 일도 했다고 합니다

 

두 가지를 무슨 저울에 달듯이 어느게 더 컸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시인의 시에서 ' 회한'이나

' 자기 혐오' 에 한 동인이 되었을 것이기에 여러가지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문학이나 예술하는 분들, 그것 빼고 나면 다른 부분에 관심도 없거니와 살아가는 기술이 부족해서 살아생전

엄청 고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흐나 이중섭 같은 분이 여기 해당 됩니다. 그림그리는 것이 본업인데 인정도 못 받고

상품성을 전혀 갖지 못하면 당장 생계가 어려워지니까요

 

저는 삶을 생존- 생활- 자아실현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데요.

일단 생존해서 생활이 가능해야 문학도하고 예술도 하는데... 순수한 예술인일수록 생활력이 없고 무능해서

가족들까지 엄청 고생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술가들 중에 본인은 예술만 해도, 먹고 사는 일의 내조뿐 아니라 재능이 빛을 보도록 뒷바라지 하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부인인 경우도 있고, 형제 자매거나 나중에는 자식인 경우도 있지요.

그래서 예술적 성취와 현실적인 생활에서 다 만족할 만한 삶을 살게 된 사람들...

 

제 가까이서 찾으라면 미술영역입니다만 통영의 ' 전혁림' 화백, ' 문신' 조각가 같은 경우가 해당되겠네요.

김수영 시인 같은 경우, 부인의 내조도 있지만 시인 본인이 가장으로서 무능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일화들이

여러군데서 보입니다.

 

 

"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다. 서울의대 부설 간호학교에서 영어 강사 노릇을 하고 있던 김수영은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이 퇴각할 때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이북으로 끌려간다.

평남 야영 훈련장에서 1개월 동안 훈련을 받은 뒤 북원훈련소에 배치된 그는 유엔군이 평양 일대를 장악하면서 자유인이

되어 남하했지만 그뒤 서울 충무로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진다.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고 스스로 전하듯이,

그는 포로수용소 야전 병원 외과 원장의 통역으로 있다가 풀려난다.

그는 이후 미8군 수송관의 통역, 선린상고 영어 교사, 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 등을 거친다. 서울 마포구 구수동 41의

2로 이사한 1955년 무렵부터 주로 양계와 번역을 하며 힘겹게 가족을 부양한다.

 

1950년대 문단에서 김수영은 노랭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누구랄 것도 없이 가난하게 살던 당시의 문인들은

원고료를 받으면 집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동료들의 막걸리값으로 풀어야 했다.

 

그것이 1950년대 한국 문단의 미풍 양속이고 관습이었다. 따라서 원고료를 안주머니에 챙겨 꼬박꼬박 집에

갖다주는 김수영의 행위는 이런 관례를 깨뜨리는 지탄받을 만한 행위였다.

그러나 김수영에게 글쓰기와 번역은 가장으로서 생활비를 버는 노동이었다.

그는 작품이 발표되거나 번역 원고를 넘기고 나면 신문사나 잡지사로 찾아가 당당하게 원고료를 재촉한다.

 

창작을 노동으로 생각하는 시인에게 그것은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김수영의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떤 잡지 편집자는 몇 밤을 새워

번역을 해서 찾아간 김수영에게 대놓고 “당신이 일해 오는 것은 무서운 생각이 든다.”고 모욕적인 말을 내뱉기도..."

 

완벽한 인간이 없기에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면서 살아가는게 인생이긴 합니다

평범한 우리로서는 동시대 함께 살아 보지 않아서 미주알 고주알 그 사람의 장 단점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겉으로 보이는 그 이미지만으로 평가할 수 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인이나 ' star' 들은 아홉가지 장점이 있더라도 한 두가지 과오나 허물이 더 돋보여서(?)

엄청 비난을 받게 되거나 두고두고 가십거리가 되는 것일까요? 유명세라고 합니다만...

 

아니면 제 개인적으로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 보니 '그것만 아니었으면 , 그 일만 없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인지, 그도 아니면 좋은 것 보다 나쁜 점을 먼저 떠 올리는 고약한 심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본인으로서는 잊고 싶은, 기억하기 싫은 일일텐데... 굳이 그것부터 떠 오르네요.

 

김수영 시인의 ' 죄와 벌'을 두고 시인의 ' 여성관'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종의 패러디 시라곤 해도 휴머니스트 일 것 같고 페미니즘적(?)인 인격을 지녀 여성을 존중할 것 같은 시인이 한 대로변에서

우산으로 부인을 때렸다(폭행)? 누구보다 시대에 앞선 전위적인 시인도 당시 가부장제적이고 남성우위의 시대적인 한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시로 써서 자기비판을 했기에 거대한 시인다운 풍모가 드러난다고 해석하기도 하고요.

 

김수영 시인이 자주 사용했던' 여펜네' 였던 당사자가 그 당시 상황을 회상하는 다음 일화를 참고해서 나름

짐작 해 봅니다.

 

김 시인이 "술을 무지무지하게 먹고 들어오는 날이 있는데, 그런 날은 길에서 이○○를

만났다든지 하는 자극이 있는 날"이라는 말로 남편에 대한 미안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부인은 또 "1년에 한두
번 무지무지하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내가 꼭 냉수를 떠다 줬다"고 덧붙였다.

                  - 김현경 어느 대담에서

               

" 광화문 근처에서 과외 공부를 하는 큰아들 준을 기다리는 동안 당시 조선일보사 모퉁이에 있던 영화관에서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 감독의 〈길(La strada)〉을 보았다.

수영과 나는 좋은 영화가 개봉되면 항상 같이 극장을 찾았다.

그날은 다섯 살 된 둘째 아들 우도 함께 갔다. 영화를 잘 보고 나오는데 수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나를 사정없이 때렸다. 대로변에서, 그것도 어린 아들 앞에서 부인을 때리는 시인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시에다 우산을 두고 온 일이 아깝다고 말하는 시인의 감정에는 무엇이 섞여 있었을까?

 

그일이 있고 한참 후에야 그날, 수영의 심리를 조금이나마 헤아려볼 수 있었다. 일단 장남의 과외 교사가 신통치 않아

수영의 마음이 불편했던 것. 아니 그보다는 배우 줄이에타 마시나와 앤서니 퀸이 남루한 모습을 한 채 방랑하는

야바위꾼으로 나왔던 그 영화. 상영내내 펼쳐지던 황량하리만큼 넓은 영화의 공간.

영화 속 주인공들의 기형적인 사랑과 욕망. 그리고 수영과 나.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수영은 나를 때리고

「죄와 벌」을 썼는지 모른다. 수영은 그날 일에 대해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다. 1958년 가을이었다.

 

                         - 김현경 에세이, 『김수영의 연인』(책읽는 오두막, 2013)

 

 

본인 당사자의 생각과 제3자의 생각은 좀 다를 수 있겠습니다

인간은 어떤 좋지 않은 사건에 대해 (자신에 대한 통찰이 되어 있지 않으면) 분명 자신을 정당화 시키거나 합리화

시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그게 마음 편하고 ' 죄의식' ' 죄책감' 을 들어주기 때문이지요

그럴 땐 전혀 이해관계가 없는 제 3자의 관점이 오히려 객관적 일 수 있습니다.

 

특히 젤소미나가 나오는 ' 길' 이란 영화를 보고 나온 직후 라고 하니 그 내용에 비추어 시인의 심정이 얼핏

이해가 갑니다. 영화에서는 남자가 약간 모자란 듯한 여성을 쫓아내고 또 따라 붙고...

그 두 사람의 상황과 심리에 투사되어 시인이 자신 스스로에게 화가 났을 수도 있고, 자신이 행방 불명 되었을 때

친구와 살았던 부인에게 입은 상처가 억눌려 있다 폭발 해 나왔을 복잡 다단한 심경...   

 

 

 

' 장미여관 ' 블로그에서 가져온 다음 내용에 공감이 갑니다 작성자 소통

 

 

한국 전쟁...인민군 징용...거제 반공 포로수용소 수용... 그 사이 친구와 딴살림을 차린 아내...

김수영은 왜 그런 아내와 다시 결합을 하고 아이를 낳고 죽을 때까지 한 지붕 아래 같이 살았을까...

소위 하이데거式 사랑인가... 트라우마로 인한 병적인 집착인가...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그의 아내.. 김현경이 지금도 그걸 시인의 사랑이라 부른다는 것... 그런 그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

어쨌거나 「죄와 벌」을 통해 드는 생각은...

아내 김현경에 대한 사랑을 이제 끝냈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죽을 만큼 사랑한다는 것"과 "죽일 만큼 미워한다는 것"은 어쩌면 동전의 양면일지도 모르겠다...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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