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박형권 아빠의 내간체

생게사부르 2018. 7. 27. 13:33

박형권


아빠의 내간체
         - 실연의 힘


가로등이 앞으로 굽은 것을 보면
가로등 앞에 얼굴을 기댈 누군가가 있었을 거야
그 누군가는 표정이 깊고 눈썹이 조금 쳐졌으며,
달뜬 손으로 가로등의 등을 감쌌을 거야
눈비 오거나
가로등이 흑흑 울 때
그는 조용히 가로등을 달래고
' 방 한 칸도 없지만 이대로도 좋아' 하며
단단한 어깨에 가로등의 얼굴을 당겨 안았을 거야
가로등의 허리를 안고
가로등의 고독을 쓰다듬으며
좀처럼 켜지지 않는 가로등의 몸을 켰을 거야
가로등이 고개를 추켜세워 하늘을 비추지 않고
낮은 생태계를 밝히는 걸 보면
가로등의 그가 가로등보다 키가 조금 작았을 거야
가로등만 있고 가로등의 그가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없다고 믿는 우리가 그를 지웠기 때문이야
그는 쓰러지며 가로등에게
기다 릴 것 없다고 말했을 거야
그 말이 가로등이 믿지 않더라도
다른 가로등을 찾아간다고도 말했을 거야
아빠도 엄마 만나기 전에 실연 한번 당했어
나보다 키가 작은 그녀의 입술에 닿기 위하여 고개를
숙여야 했지
그 때 불현 듯
민들레와 달팽이들이 가꿔 놓은
발아래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어 누가 그러더라
사랑해 본 사람만이 사랑할 줄 안다고
살다보면 사랑이 멀어질 때도 있는 거야 넌 흔들리지
말고 낮은 곳을 바라보아라
보아주는 것 만으로도 그들은 행복할 거야
넌 꼭 그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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