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1052

이명耳鳴, 나희덕

이명(耳鳴)/ 나희덕 새로운 배후가 생겼다 그들은 전화선 속에서 숨죽여 듣고 있다가 이따금 지직거린다, 부주의하게도 그는 엿들으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어쩌면 그는 아주 선량한 얼굴을 지녔을지 모른다 절제된 표정과 어투를 지닌 공무원처럼 경험이 풍부한 외교관처럼 이삿짐센터 직원이나 택배기사처럼 무심한 얼굴로 초인종을 눌렀는지도 모른다 문 뒤에 서 있는 투명인간들 주차장 입구에서 현관문 앞에서 복도와 계단에서 우연히 마주친 듯 지나는 낯선 얼굴들 개 한 마리가 다가와 마악 내려 놓은 쓰레기봉지를 컹컹거리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배후는 배후답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어느 날 귓바퀴를 타고 들어와 잠복 중인 발소리 새로운 배후가 생긴 뒤로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귀가 운다 피 흘린다 풀벌레들이 낮밤을 가리..

구멍/ 유이우

구멍/ 유이우 세계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더 가야 할지 얼마나 덜 가야 할지 모르는 채로 더 멀리 가버리는 새처럼 세계지도처럼 당당하고 비행기는 날고 구름이 피해가고 별은 사람을 비추었다 숫자처럼 엉켜 있어 만져지는 허공을 해석되지 않는 세계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 풍경에서는 세계가 틀림없이 멈춰 서고 그때 그런 삶도 있겠지 싶은 골목으로 바람이 걸어나갔다 창비시선 434 1988. 경기 송탄 2014. 중앙신인 문학상 등단 시집: 내가 정말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