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핑크뮬리/ 김희준

생게사부르 2020. 9. 11. 07:45

핑크뮬리/ 김희준

 

 

거미는 노을을 빨아 먹고 실을 뿜는다 태양의 잔상으로 피는 꽃도 다를 것 없다 물의 농도에 따라 들판은 짙어가고

새의 영혼이 흔들린다

용암정 오르는 길

겉옷 하나 살뜰하지 못한 계집애를 봤다 늙은 아비와 막걸리 냄새 진동하는 방안에 빨랫줄을 걸어 놓고 산다고 했다

추운 날 늙은 아비의 빨래를 하고

손등이 터져버린 계집애는 꽃을 말려 팔았다

 

어느 벼랑에서 꺾었기에

고혹한 향을 내는지

꽃차 머금으며 꽃차의 내력을 마신다

저녁의 지문을 허락받은 바람이 스며들 때마다

계집애의 단발머리와 오롯이 걸린 빨랫줄을 생각한다

길을 멈춘 늙은 아비가 딸에게 바칠 꽃 한움큼 사 갔기를

억새가 엉킨 들에서 구체적인 사람이 흔들리기를

 

그리고 거미가 짜내는 실로 저 계집애 옷이나 한벌 입히면 좋겠다

 

어둠으로 저미는 날

어금니에 씹히는 꽃잎에 그애의 늙은 아비와 풀벌레와 빨랫줄이 접혀있다

 

 

 

 

함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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