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후 속수무책 김경후 속수무책 내 인생 단 한권의 책 속수무책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느냐 묻는다면 척 내밀어 펼쳐줄 책 썩어 허물어진 먹구름 삽화로 뒤덮여도 진흙 참호 속 묵주로 목을 맨 소년 병사의 기도문만 적혀 있어도 단 한 권 속수무책을 나는 읽는다 찌그러진 양철시계엔 바늘 대신 나.. 시로 여는 일상 2018.03.02
송찬호 나비 송찬호 나비 나비는 순식간에 재크 나이프처럼 날개를 접었다 펼쳤다 도대체 그에게는 삶에서 도망이란 없다 다만 꽃에서 꽃으로 유유히 흘러 다닐 뿐인데 수 많은 눈이 지켜보는 환한 대낮에 나비는 꽃에서 지갑을 훔쳐내었다 시로 여는 일상 2018.02.28
김영주 시인과 사람 김영주 시인과 사람 좋은 사람을 만나면 안아주고 싶지만 좋은 시를 쓴 사람은 업어주고 싶다시던 시인은 가고 없어도 그 말씀은 남았네 안아주고 싶도록 좋은 사람 많은데 업어주고 싶도록 좋은 시 넘치는데 시인은 사람이 그립고 사람은 시인이 그립다 시로 여는 일상 2018.02.26
천수호 바람의 뼈 천수호 바람의 뼈 시속 백 킬로미터의 자동차 창 밖으로 손 내밀면 병아리 한 마리를 물커덩 움켜쥐었을 때의 그 느낌 바람의 살점이 오동통 손바닥 안에서 만져진다 오물락 조물락 만지작거리면 바람의 뼈가 오드득 빠드득 흰 눈 뭉치는 소리를 낸다 저렇듯 살을 붙여가며 풀이며 꽃이며.. 시로 여는 일상 2018.02.25
박서영 던졌던 순간 박서영 던졌던 순간 화가 나서 베란다의 화분을 던졌다 식탁위의 꽃병을 던졌다 화가 난 순간이 아니라 깨지기 쉬운 무언가를 던졌던 바로 그 순간이 내게도 있다 식탁위에서 두개의 꽃병이 서로의 목을 움켜쥔다 식탁위에서 두개의 꽃병이 서로에게 달려들어 깨져버린다 내 몸의 일부는.. 시로 여는 일상 2018.02.24
배용제 그녀의 깊은 속 배용제 그녀의 깊은 속 들여다본다, 깊은 그녀의 속 그곳은 이미 입구부터 어두웠고 내 눈의 검은 창엔 검은 빛으로 가득해진다 검은 문고리를 더듬더듬 만지며 핥으며 그녀 속으로 들어간다 검은 담이 있고 창이 있고 식탁이 있고 텃밭이 있고 언덕이 있고 강이 있고 바다가 있고, 온통 .. 시로 여는 일상 2018.02.23
유홍준 신발 베고 자는 사람 신발 베고 자는 사람 / 유홍준 아직 짓고 있는 집이다 신축공사현장이다 점심 먹고 돌아 온 인부들 제각각 흩어져 낮잠 잘 준비를 한 다 누구는 스티로폼을 깔고 누구는 합판을 깔고 누구는 맨바 닥에 누워 짧고 달콤한 잠의 세계로 빠져 들어갈 준비를 한다 신발 포개 베고 자는 사람은 신발 냄새를 맡는다 옷을 둘둘 말아 베고 자는 사람은 웃옷 냄새를 맡는다 딱딱한 각목 동가리를 베고 자는 사람은 딱딱한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찌그러지든 말든 상관 없는 신발 두짝을 포개 베고 자는 사람은 생각한다 버려야할 것과 새로 사야할 것들 이제는 다 옛일이 되어버 린 것들을 생각한다 (사실은 아무 생각도 안한다) 아직 문짝이 끼워지지 않은 집은 시원하다 시원하다는 것은 막히지 않았다는 거다 세상 모든 집은 완공되기 전에 인.. 시로 여는 일상/유홍준 시, 시교실 2018.02.19
이규리 겹동백 이규리 겹동백 한 나무에서 가지와 또다른 가지가 불화에 시달렸으나 내게 있어서 꽃이란 참았다 터트리는 기침 닽은 것. 돌아앉아 우는 울음 같은 것. 사고 싸 놓았던 내 몸이 붉게 우는 울음 아버지 모른 체 문턱으로 단단한 음성이 드나들었다 아직도 핏줄 속을 도는 아버지의 지시.. 시로 여는 일상 2018.02.18
박서영 달고기와 눈치 박서영 달고기와 눈치 물속에 달이 뜬다 깊이라는 말의 안쪽에는 잿빛 몸에 노란 테를 두른 검은 반점무늬의 달고기가 살고 있다 어쩌다가 물고기가 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영혼이 있는 동안에는 황금빛 달무리를 머리에 쓰고 떠돌아도 좋으련만 우리의 얼굴에는 눈치라는 물고기가 모여.. 시로 여는 일상 2018.02.17
허영숙 꽃싸움 꽃싸움 / 허영숙 느티나무 그늘을 펴놓고 할머니 여럿 둘러앉아 꽃싸움을 한다 선이 된 사람이 꽃잎 몇장을 깐다 손 끝에서 매화가 피고 모란이 피고 국화가 피고 새가 울고 달이 뜨니 창포도 한꽃대 밀어올린다 거듭 나는 열 두달 주름의 행간으로 스민 생의 사계가 저 곳에 있다 꽃등만 보고도 꽃말을 맞추는 나이 패를 들켜도 두려울 것이 없다 빛날 광에 목숨 걸지 않아 단풍 든 시절이 한참 지난 저 싸움엔 패자도 없다 꽃 필 때마다 웃음도 그늘로 거느리고 있는 느티나무 심판관 꽃값을 대신 읽어 줘서 하늘하늘 즐겁다 꽃잎끼리 부딪칠 때마다 씨방에서 터지는 꽃 웃음 다시 꽃을 볼 수 있을 까 조심스레 마지막 꽃잎을 꺼내는 손 끝에 바람도 긴장한다 꺼내 놓을 패가 없어 뒤집을 것도 없지만 눈 부시게 피던 시절을 지금.. 시로 여는 일상 2018.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