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1052

유홍준 신발 베고 자는 사람

신발 베고 자는 사람 / 유홍준 아직 짓고 있는 집이다 신축공사현장이다 점심 먹고 돌아 온 인부들 제각각 흩어져 낮잠 잘 준비를 한 다 누구는 스티로폼을 깔고 누구는 합판을 깔고 누구는 맨바 닥에 누워 짧고 달콤한 잠의 세계로 빠져 들어갈 준비를 한다 신발 포개 베고 자는 사람은 신발 냄새를 맡는다 옷을 둘둘 말아 베고 자는 사람은 웃옷 냄새를 맡는다 딱딱한 각목 동가리를 베고 자는 사람은 딱딱한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찌그러지든 말든 상관 없는 신발 두짝을 포개 베고 자는 사람은 생각한다 버려야할 것과 새로 사야할 것들 이제는 다 옛일이 되어버 린 것들을 생각한다 (사실은 아무 생각도 안한다) 아직 문짝이 끼워지지 않은 집은 시원하다 시원하다는 것은 막히지 않았다는 거다 세상 모든 집은 완공되기 전에 인..

허영숙 꽃싸움

꽃싸움 / 허영숙 느티나무 그늘을 펴놓고 할머니 여럿 둘러앉아 꽃싸움을 한다 선이 된 사람이 꽃잎 몇장을 깐다 손 끝에서 매화가 피고 모란이 피고 국화가 피고 새가 울고 달이 뜨니 창포도 한꽃대 밀어올린다 거듭 나는 열 두달 주름의 행간으로 스민 생의 사계가 저 곳에 있다 꽃등만 보고도 꽃말을 맞추는 나이 패를 들켜도 두려울 것이 없다 빛날 광에 목숨 걸지 않아 단풍 든 시절이 한참 지난 저 싸움엔 패자도 없다 꽃 필 때마다 웃음도 그늘로 거느리고 있는 느티나무 심판관 꽃값을 대신 읽어 줘서 하늘하늘 즐겁다 꽃잎끼리 부딪칠 때마다 씨방에서 터지는 꽃 웃음 다시 꽃을 볼 수 있을 까 조심스레 마지막 꽃잎을 꺼내는 손 끝에 바람도 긴장한다 꺼내 놓을 패가 없어 뒤집을 것도 없지만 눈 부시게 피던 시절을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