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1052

박성우 거미

거미/ 박성우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 만에 유령거미같은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뒷굽 허형만

뒷굽/ 허형만 구두 뒷굽이 닳아 그믐달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수선집 주인이 뒷굽을 뜯어내며 참 오래도 신었네요 하는 말이 참 오래도 사시네요 하는 말로 들렸다가 참 오래도 기울어지셨네요 하는 말로 바뀌어 들렸다 수선집 주인이 좌빨이네요 할까봐 겁났고 우빨이네요 할까봐 더 겁났다 구두 뒷굽을 새로 갈 때마다 나는 돌고도는 지구의 모퉁이만 밟고 살아가는게 아닌지 순수의 영혼이 한 쪽으로만 쏠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한사코 한 쪽으로만 비스듬히 닳아 기울어가는 그 이유가 그지 없이 궁금했다 * * * 6.10일 ' 민주 항쟁 기념일'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달력에 적힌 기념일 만으로도 역사공부가 되는데... ' 좌빨이네요 할까봐 겁났고 우빨이네요 할까봐 더 겁났다' 걸음걸이 습관이 달라 닳아진 구두 뒷굽 가는데도..

선인장 유홍준

선인장/ 유홍준 푸른 가시가 박힌다 외로움이 목을 뽑고 눈썹을 밀어올린다 가시눈물은 사막을 적실 수 없다 눈물은 사막의 달이 다 핥는다 砂邱위에서 불어내는 휘파람 늙은 낙타의 귀를 채 운다 손끝까지 가시가 뻗친다 더 이상 편지를 쓸 수가 없다 모래만 몇 줌 쥐었다 놓았다 또 누가 사막에 들어서나 가시 박힌 눈동자가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이영광 숲

숲/ 이영광 나무들은 굳세게 껴안았는데도 사이가 떴다 뿌리가 바 위를 움켜 조이듯 가지들이 허공을 잡고 불꽃을 튕기기 때문이다 허공이 가지들의 氣合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 다 껴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무른것으로 강한 것을 전심전력 파고 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무들의 손 아귀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리가 없다 껴안는다 는 것은 또 이런것이다 가여운 것이 크고 쓸쓸한 어둠을 정신없이 어루만져 다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 글거리는 포옹 사이로 한 부르튼 사나이를 有心히 지나가 게 한다는 뜻이다 필경은 나무와 허공과 한 사나이를, 딱 따구리와 저녁바람과 솔방울들을 온통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구멍 숭숭 난 숲은 숲子로 섰다 숲의 단단한 골다 골증을 보라 껴안는다는 것은 이렇게 전부를 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