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1052

길상호 손톱 속의 방

손톱 속의 방/ 길상호 쓸쓸하게 배가 아픈 밤 손을 따고 들어가보는 방 손톱의 창에 박혀 있던 가시는 곪은 바람을 또 불러들이고 명치에 쌓인 나를 쓸어 내리며 당신은 아무 말 없네 어둠이 죽은피처럼 고여 끈적거리는 그 방안에서 끊어진 손금 묶어 이으면서 당신이 보랏빛으로 떠는 동안 창 너머 하늘에 따끔 차가운 별 하나 돋아나네 서서히 굳는 핏방울과 함께 스르르 닫히고 마는 방 손톱 속에 당신을 묻고 나는 다시 나의 손금을 사네 * * * 소화력이 별로 좋지못했던지 아님 음식에 구미가 당겨 좀 급하게 정량보다 더 먹었는지... 어릴 때 부터 한 번씩 급체에 시달릴 때가 있었습니다. 명치끝이 막혀 속이 갑갑하다 못해 머리까지 아프면 일이 난 거지요. 오른 쪽 갈비뼈 아래를 치면 아프기도 했고요 요즘이야 정로..

길상호 아침에 버린 이름

아침에 버린 이름 / 길상호 오래 찾아 돌아다닌 명찰은 건조대 외투 안주머니에서 나왔다 온갖 빨래들 사이에서 풀코스 세탁을 거친 것인데 물로 씻은 길상호는 잉크가 얼룩진 채 젖어 있었다 습기 가득한 명찰을 목에 걸고 아침이 두통처럼 무거워졌다 깨끗한 이름으로 살고 싶었으나 희미하게 번지기만 하던 날들, 젖은 이름을 빼 말리다가 나는 그만 찢어지고 말았다 이름을 버린 오전 현관문 앞에는 수신인을 잃어버린 편지가 빗물에 퉁퉁 불어 있었다

박영근 이사

박영근/ 이사 1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집엔 저녁이면 형광등 불빛이 켜지고 사내는 묵은 시집을 읽거나 저녁거리를 치운 책상에서 더듬더듬 원고를 쓸 것이다 몇 잔의 커피와, 담배와, 새벽녘의 그 몹쓸 파지들 위로 떨어지는 마른 기침소리 누가 왔다갔는지 때로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그 환한 자리에 더운 숨결이 일고, 계절이 골목집 건너 백목련의 꽃망울과 은행나무 가지 위에서 바뀔 무렵이면 그 집엔 밀린 빨래들이 그 작은 마당과 녹슨 창틀과 흐린 처마와 담벽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햇살에 취해 바람에 흔들거릴 것이다 눈을 들면 사내의 가난한 이마에 하늘의 푸른빛들이 뚝 뚝 떨어지고 아무도 모르지, 그런 날 저녁에 부엌에서 들려오는 정갈한 도마질 소리와 고등어 굽는 냄새 바람이 먼 데서 불러온 아잇적 서툰 노래..

이영광 경계

경계/이영광 모내기철 기다리는 남양주 들판 해질녘, 논은 찬데 황새는 물 위에 떠 있다 보이지도 않는 긴 다리를 철심처럼 진흙에 박아놓고 가까이서 보면 그는 외발, 가늘고 위태로운 선 하나로 드넓은 수면의 평형을 잡고 있다 물 아래 꿈틀대는 진흙 세상의 혈을 짚고 서 있다 황새는 꿈 꾸듯 생각하는 새, 다시 어두워 오는 누리에 불현듯 남은 그의 외발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한 발 마저 디딜 곳을 끝내 찾지 못했다는 것일까 진흙 세상에 두 발을 다 담글 수는 없다는 것일까 저 새는 날개에 스며 있을 아득한 처음을, 날개를 움찔거리게 하는 마지막의 부름을 외발로 궁리하는 새, 사라지려는 듯 태어나려는 듯 일생을 한 점에 모아 뿌옇게 딛고 서 있었는데 사람 그림자 지나가고, 시린 물이 제자리에서 하염없이 밀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