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1052

최영미 가을에는, 혼자라는 건

가을에는/ 최영미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 놓은, 뭉게 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 온다 뭉게뭉게 피어난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혼자라는 건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어 본 사람은 알지 혼자라는 ..

김승희 여행에의 초대

여행에의 초대/ 김승희 모르는 곳으로 가서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좋다, 모르는 도시에 가서 모르는 강 앞에서 모르는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모르는 오리와 더불어 일광욕을 하는 것이 좋다 모르는 새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여기가 허드슨 강이지요 아는 언어를 잊어버리고 언어도 생각도 단순해지는 것이 좋다 모르는 광장 옆의 모르는 작은 가게들이 좋고 모르는 거리 모퉁이에서 모르는 파란 음료를 마시고 모르는 책방에 들어가 모르는 책 구경을 하고 모르는 버스 정류장에서 모르는 주소를 향하는 각기 피부색이 다른 모르는 사람들과 서서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며 너는 그들을 모르고 그들도 너를 모르는 자유가 좋고 그 자유가 너무 좋고 좋은 것은 네가 허드슨 강을 흐르는 한포기 모르는 구름 이상의 것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