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유병록
사과밭에서는 모든 게 휘어진다
봄날의 약속이 희미해지고 한여름의 맹세가 식어간다 사과밭을
지탱하던 가을의 완력도 무력해진다
벌레 먹듯이
이제 내가 말하는 사과는 네가 말하는 사과가 아니다
모든게 어긋난다
우리는 다른장소에서 서로를 기다리다가 지쳐버린다
내가 사과를 건네도 네 손은 비어있다
농담을 해도 너는 웃지 않는다
사과가 떨어진다
돌이킬 수 없는 거리로 아득해진다
사과가 한 광주리의 향기 쏟으며 썩어간다
멀리 가지는 않고
사과나무 발치에서 썩어간다 사이를 짐작하다 말을 잃은자처
럼, 그의 핏기 없는 입술처럼
- 2015.<현대시>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