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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 신정민

홍어/ 신정민 말이 좋아 삭힌거고 숙성이지 결국은 조금 상한 것 아니겠는가 시들어 꽃답고 늙어 사람답고 막다른 골목이 길 답고 깨어 헛것일 때 꿈답던 꿈 우리의 한 시절은 모두 비(非)철에 이루어진다 냉동실에 안치된 채 구천을 떠돌고 있는 박봉규씨만 봐도 그렇다 노점공구상 그가 폭력적인 단속에 항의하다 분신, 목숨을 잃자 사람들은 그를 열사라 불렀다 우리 모두 열사가 될 수 있는 시대 그는 추리소설의 시작처럼 죽었고 덕분에 살아남은 우리들이 판을 쳤다 어둠아, 사람만큼 상한 영혼을 가진 물건이 어딨더냐 죽을똥 살똥 살아도 허구헌 날, 그날이 그날인 사람아 * * * 평범한 대다수 우리의 한 시절 모두 非철 시들어 꽃 답고 늙어 사람답고 막다른 골목이 길 답고 깨어 헛것일 때 꿈답던 꿈 박봉규씨의 삶처럼...

평행세계/ 김희준

평행세계/ 김희준 소나기가 지난다 당신은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을 나열하는 취미를 가졌다 책냄새를 달가워하지 않는 벌레가 낡은 책갈피를 덮는다 서점엔 괜찮다가도 괜찮지 않은 책들이 오르내린다 책장은 만들어지고 가구점에선 나무가 제 생을 다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내 자리 한칸 없다는 사실이 나를 밤으로 내몬다 과일가게에선 늙은 사과가 굴러 다니고 그해 블랙홀은 가운데가 뚫린 모양이라는 기사를 본다 그러면 우리에겐 서로의 심장 이 있다가도 사라지곤 했다 나는 사과를 먹었다가도 다시 뱉어내고 괜찮다가도 괜찮지 않아질 수 있었다 속성을 반복하는 것이 당신의 이름이라면 우린 자라면서 자라지 않는 측백나무 길을 산책로 삼았을 것이다 내리면서 내리지 않는 비를 맞으며 맨발로 걷다가 발에 밟힌 개미를 죽이면서 죽이지 않..

슬픔이라는 내용을 가진 한 때/ 강재남

슬픔이라는 내용을 가진 한 때/ 강재남 단단하고 헐거운 감정이다 일시에 터지는 빛이라는 거다 태양이 쓴 문장을 읽는다 흰 그림자를 가만히 본다는 거다 누군가 그리워하기 좋을 때다 골목너머로 시간이 진다는 거다 울음 닮은 침묵이 골목에 박제된다 돌아오지 않을 사람과 약속을 한다는 거다 빛이 빛으로 환원되는 순간,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익숙해지는 것들에 마음을 내려놓고 단단하고 헐거운 감정을 말린다 그림자의 휴식처를 궁금해 말아야 한다는 거다 낮고 초라한 곳이어도 그래, 그럴 때도 있지 담담해 진다는 거다 훌쩍 자란 계절의 뼈를 만진다 제 색으로 눈물을 만드는 사랑이라는거다 수선화 라일락이 지고 봉숭아 씨앗이 여문다 사람이 사람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 모던포엠 2020.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