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김지녀 쿠바에서 방배동으로 가는 버스

생게사부르 2018. 5. 6. 08:04

김지녀


 

쿠바에서 방배동으로 가는 버스


 

때도 모르고 터져 나오는 눈물 같은 것으로 나는 옆길로 빠지고
코를 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온다

옷이 많아서
우유부단하고
땀을 많이 흘렸지만 정거장마다 사람들은 버스에 올라탄다
그리곤 잠에 빠진다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내 어깨로 자꾸 쏟아진다
햇살이 따가왔어 그날
애인처럼 내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들었다가
남자는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두리번거리더니 뛰쳐나간다

외로움은 이런 식이었지
정거장이 참 많아 옆자리 남자가 바뀌고 때론
여학생이 앉아 화장을 고치고
들뜬 기분으로 낭비된 하루는 섰다 가다를 반복한다
다음 정류장은 마흔
오르막이 있는 곳
떯은 열매가 떨어진다 잎사귀만 무성한 곳
마흔에 나는 내리지 못하고
그릇에 말라붙은 음식찌꺼기를 생각한다

옷이 많은데 옷을 사고
가방 속에 가방과 더 작은 가방을 넣고
더 큰 가방을 찾아다닌다 옆자리에 가방이 앉아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햇살이 따가왔어 그날
쓸데 없이 젖은 휴지를 찢으면서 열정은 좋지 않은가?
약소국의 비애를 간직한 나라에서 사는 건
좋지 않은가? 좋지 그렇지 좋지
않지

가방 주둥이를 닫고
외로움은 이런식이었지
내릴 곳은 많은데 내릴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올라탄다
다 내릴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올라탄다
나는 나를 엿보면서 새로운 도시에 진입한다
다른 색으로 얼굴을 칠하고 마르기를
콧물과 우연이 마르기를
기다린다

 

 

 

 

경기도 양평

2007. '세계의 문학' 신인상 수상

시집: ' 시소의 감정' ' 양들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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