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유홍준 시, 시교실 46

유홍준 주석없이

주석 없이/유홍준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 때 너는 전반부 없이 이해됐다 너는 주석 없이 이해됐다 내 온몸에 글자 같은 가시가 뻗쳤다 가시나무 울타리를 나는 맨몸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가시 속에 살아도 즐거운 새처럼 경계를 무시하며 1초 만에 너를 모두 이해해버린 나를 이해해다오 가시와 가시 사이 탱자꽃 필 때 나는 너를 이해하는 데 1초가 걸렸다 - 시집 창비. 2006. * * * 한겨울이다. 많은 것들이 입을 닫고 있다. 고라니도 입을 닫고 다람쥐도 입을 닫고 있다. 붕어도 잉어도 입을 닫고 있다. 생존을 위해 최소한만 입을 열었다 닫을 뿐. 대다수의 것들이 다 침묵을 하고 있다. 나 사는 마을 뒷산 굴참나무도 그렇고 산벚나무도 그렇다. 겨우내 입을 닫고 있다가 봄이 오면 오만 것들이 다 펑펑 꽃을 피울..

유홍준 이과두주

이과두주/ 유홍준 희뿌연 산 언덕에는 흰 눈이 내리고요 얼어죽을까 봐 얼어죽을까 봐 나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요 동치미 국물 동치미 국물을 마시며 슬픔 이과두주 마시는 밤 또 무슨 헛것을 보았는지 저 새카만 개새끼는 짖고요 저 하얀 들판에는 검은 새들이 내리고요 짬뽕 국물도 없이 시뻘건 후회도 없이 내리는 눈발 사이로 흘러가는 푸른 달 틈으로 적막하고 나하고 마주 앉아 이과두주 마시는 밤 이 조그만 것에 독한 것을 담아 마시는 밤 이 조그만 것에도 독한 것이 담기는 밤 * 이과두주의 원래 뜻은 솥에서 증류를 두번 걸러 낸 술로 우리 한자식으로 읽으면 이과두주랍니다. 아래포장은 서풍주(?)

유홍준 오동도로 가는 問喪

오동도로 가는 問喪 / 유홍준 남해 고속도로를 달리는 관광버스 안에서 한 떼의 늙 은이들이 몸을 흔들고 있다 늙음마저도 한때, 제 늙음을 탕 진하기 위하여 지랄, 발광을 해댄다 늙어빠진 것이 무슨 바 다를 뛰어들겠느냐 늙고 병든 것이 무슨 염병할 계단을 올 라가 동백을 보며 한숨을 쉬겠느냐 진작 술이 올라 시뻘게 졌다 단숨에 뚝 떨어져 버리면 그만, 呪文도, 呪術도 없이 금 방 한 무더기 진달래 군단이 되어 어라, 냅다 동백 무찌르러 달려나간다 후문으로 왔다가 후문으로 빠져나가는 불륜같 은 삶, 섬진강 휴게소에 들러 화장실마다 늙은 항문 늙은 후문 뭉텅뭉텅 피동백을 피워놓고 동백 다 봤다 동백 다 피 웠다 제 몸 속의 동백을 다 흘려보낸 늙은이들, 귀청 때리 는 트로트 메들리가 장송곡으로 들려 오는 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