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계(藍溪)서원과 청계(靑溪)서원
시인학교 가을 나들이로 남계서원과 용추폭포를 방향으로 잡았는데 출발할 때 맑더니 가는 중에 빗 방울이...
비가 온다고 예보가 되긴 했었지만 또 중간에 햇빛이 나길래 우산도 안 가져 온 사람이 많았는데
도착하니 비가 제법 내려 사진이 흐리네요.
서원(書院)은
조선초기의 교육제도는 한양에 사부학당과 성균관, 지방의 향교를 중심으로 관학이 기반을 이루었지만
세조의 집현전 폐지와 성균관의 황폐화 등으로 관학이 점차 교육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유학자들은 개인적으로 서재(書齋), 정사(精舍) 등의 사학(私學)을 설립하여
학문을 보급하고 계승하기도 하였지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유학을 국가통치 이념으로 하여 출발한 조선은 양반을 중심으로 유교의 가르침을
확산시켜 백성들의 생활에도 유교문화가 자리잡아 가기를 권장합니다
그 때 마침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서원을 세우게 되면서 이후로 전국 곳곳에 서원이 세워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주세붕이 평소 흠모하던 고려말의 학자 안향(유)선생이 어린시절 수학했던 순흥 숙수사 터에
배향하고 중국 주희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백운동서원으로 개창하게 된 것이 그 시초였습니다 (중종 1543).
1546년(명종 1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향의 후손 안현의 노력으로
서원운영에 대한 다소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으며 그 2년뒤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은
1549년 이 서원에 대하여 중국의 예에 준한 지원을 해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였습니다.
이를 허락한 명종은 소수서원이라 쓰신 편액을 하사하고 (명종5. 1550년)
아울러 사서오경, 성리대전 등의 서적과 함께 노비를 하사하여
최초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자리매김합니다.
남계서원이 위치한 함양 땅은 예로부터 '좌안동 우함양'이라 하여, 한양에서 볼 때 낙동강 왼쪽인 안동과
오른쪽인 함양은 모두 훌륭한 인물을 배출해 내어 학문과 문벌에서 손꼽히던 고을들입니다.
남계서원(灆溪書院)은 1552년(명종 7년)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고, 1566년(명종 21년)에 '남계(灆溪)'라는 이름으로 사액되었습니다.
당시 사액(賜額)서원은 임금으로 부터 서원의 이름(현판)을 하사 받는다는 의미이지만 실제
서원을 운영 할수 있는 토지와 노비를 국가로 부터 지원 받는다는 의미였기에
전국 여기저기 서원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후기로 가면서 서원의 남발은
지역별 파벌을 형성했고 붕당의 근간이 되어 그 뿌리가 깊어졌으며 국가 재정을 좀 먹게되어
대원군에 이르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할 정도로 강한 의지로 서원을 철페하게 되는 것이지요.
'남계'는 서원 곁에 흐르는 시내 이름에서 나왔으며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소실된 뒤
나촌(羅村)으로 터를 옮겼다가, 1612년(선조 43) 옛 터인 현재의 위치에 다시 옮겨 중건되었습니다.
이곳은 구릉을 등진 지형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원 앞으로는 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계천이 흐르고,
그 앞 넓은 들판 너머로 안산(案山)인 백암산이 서원을 마주 보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서원에서는 보기 드문 연지가 동재의 애련헌, 서재의 영매헌 남쪽에 각각 하나씩 조성되어 있기도 합니다.
남계서원은 풍기 소수서원, 해주 문헌서원에 이어 창건된 아주 오래된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건물 배치에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것과 달리
남계서원은 서원의 제향 공간에 속하는 건물들은 서원 영역 뒤쪽에 자리 잡고,
강학공간에 속하는 건물들은 서원 영역 앞쪽에 자리 잡은
조선시대 서원 건축의 초기 배치 형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서원인 셈입니다.
우리 총무님 대표로 방명록 이름 올리시고...
비도 오겠다. 따끈한 차 한잔...꽃 차였던 것 같아요.
보통 앞 쪽에 강당과 학생들 기숙사 역할의 동재 서재가 있습니다.
아래는 요즘으로 치면 도서관입니다.
비 내리는 강당 대청마루에 시인학교 학생들이 앉아 있는 앞모습과 뒷모습입니다.
뒷쪽으로 제향하는 사당이 있고 그 옆에
제사준비를 위해 그릇을 보관하거나 음식을 준비하는 전사청이 있지요.
사당 입구 나무백일홍 (배롱나무)인데 한창 꽃이 피면 장관일 것 같습니다.
우리가 떠나려 할 때쯤 젊은 학생들이 무리지어 들어 왔습니다.
어디 답사팀인가 했더니 원광대학교 역사과 학생들이라네요.
역시! 전공하는 학생들은 날씨의 날궂이를 가리지 않습니다.
여기를 들릴 계획이 있으신 분은 온김에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 개평마을
일두 정여창 고택도 함께 둘러보면 좋을 듯 합니다.
바로 옆에 조선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 위한 청계서원靑溪書院이 있습니다.
김일손은 사관(史官: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으로 있으면서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사초史草에
넣었다는 이유로 무오사화때 희생됩니다.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회왕 즉, 초 의제를 추모하는 글인데 세조의 왕위찬탈을 풍자하여
은근히 비난한 글이라하여 연산군을 부추겨 사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당시 김종직은 이미 돌아가셨는데 부관참시를 당하게 되고 영남학파 학자들이 대거 희생을 당하게 됩니다.
조선건국 당시는 학자였지만 정치에 참여하면서 관료로 변한 훈구파들이 지방출신으로 막 등용되기 시작하여
3사(사간원, 홍문관, 사헌부)등에 자리를 잡으면서 세력을 형성해 가는 士林들을 제거하기 위한 서막이었던 셈입니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한정된 관직과 토지를 두고 훈구와 사림들 간에 권력 다툼이 벌어진 것인데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기 전의 신진사림들이 4차례에 걸쳐 대거 축출되면서 희생을 가져오게 되는 사건입니다.
요즘으로 비유하자만 여당과 행정관료들, 기득권을 비판하는 야당역할격인 사림과(요즘 언론)의 권력다툼이
4대사화인데 특히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윤비폐출)는 판단능력이 부족한 연산군 때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당시에는 역적으로 치부되지만 결국 시일이 지나면 학자로서 평가를 하게되고
그 학문을 높이 사는 사람들이 재평가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김 일손이 한때 (1495. 연산군 1년) 머무르면서 ‘청계정사’를 세우고 후학을 가르쳤던 것을 기념하여,
광무 10년(1905) 지역 유림들이 그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가 1915년에 청계서원을 건립합니다.
구경재와 동재, 서재, 홍남문, 솟을삼문 등의 건물이 남아 있고,
강당을 중심으로 강학공간이 낮은 곳에 사당이 높은 곳에 위치한 전학후묘 공간배치이며
온돌방 칸에 누마루 정도라 실제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 보다는 제향기능과
손님들이 잠깐씩 머무는 정자역할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목천 도동서원과 청도 자계서원에도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 하네요.
비가 와서 청계서원에는 들어가서 제대로 둘러보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사진만 한장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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