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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의 어린 사제/박노해

이스탄불의 어린 사제/ 박노해 폭설이 쏟아져 내리는 이스탄불 밤거리에서 커다란 구두통을 멘 아이를 만났다 야곱은 집도 나라도 말글도 빼앗긴 채 하카리에서 강제 이주당한 쿠르드 소년이었다 오늘은 눈 때문에 일도 공치고 밥도 굶었다며 진눈깨비 쏟아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작은 어깨를 으쓱한다 나는 선 채로 젖은 구두를 닦은 뒤 뭐가 젤 먹고 싶냐고 물었다 야곱은 전구알같이 커진 눈으로 한참을 쳐다보더니 빅맥, 빅맥이요! 눈부신 맥도날드 유리창을 가리킨다 학교도 못가고 날마다 이 거리를 헤매면서 유리창 밖에서 얼마나 빅맥이 먹고 싶었을까 나는 처음으로 맥도널드 자동문 안으로 들어섰다 야곱은 커다란 햄버거를 굶주린 사자 새끼처럼 덥석 물어 삼키다 말고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면 담배를 물었다 세입쯤 먹었을..

겨울 휴관/ 김이듬

겨울 휴관 / 김이듬 무대에서 내려왔어 꽃을 내미네 빨간장미 한송이 참 예쁜애구나 뒤에서 웃고 있는 남자 한때 무지 좋아했던 사람이 목사가 되었다 하네 이주 노동자 들 모이는 교회라지 하도 괴롭혀서 도망치더니 이렇게 되었구나 하하하 그 가 웃네 감격적인 해후야 비록 내가 낭송한 시라는게 성직자에게 들려주긴 참 뭐한거였지만 우린 조금 걸었어 슬며시 그의 딸 손을 잡았네 뭐가 이리 작고 부드 러울까 장갑을 빼려다 그만두네 노란코트에 반짝거리는 머리띠 큰 눈동자 는 내 눈 을 닮았구나 이 애 엄마는 아마 모를거야 근처 미술관까지 차가운 저녁 바 람 속을 걸어가네 휴관이라 적혀있네 우리는 마주보고 웃다가 헤어지려네 전화번호라도 물어볼까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할 거라하네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 ..

12월/ 김이듬

12월 / 김이듬 저녁이라 좋다 거리에 서서 초점을 잃어가는 사물들과 각자의 외투 속으로 응집한 채 흔들려 가는 사람들 목 없는 얼굴을 바라보는 게 좋다 너를 기다리는 게 좋다 오늘의 결심(決心)과 망신(亡身)은 다 끝내지 못 할 것이다 미완성으로 끝내는 것이다 포기를 향해 달려가는 나의 재능이 좋다 나무들은 최선을 다해 헐 벗었고 새떼가 죽을 힘을 퍼덕거리며 날아가는 반대로 봄이 아니라 겨울이라 좋다 신년이 아니고 연말, 흥청망청 처음이 아니라서 좋다 이제 곧 육신을 볼 수 없겠지 움푹 파인 눈의 애인과 창백한 내 사랑아 일어나라 내 방으로 가자 그냥 여기서 고인물을 마시겠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널 건드려도 괜찮지? 숨 넘어 가겠니? 영혼아, 넌 내게 뭘 줄수 있었니? - 말 할 수 없는 애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