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555

서울로 가는 全琒準/안도현

서울로 가는 전봉준/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萬頃)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 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琒準)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 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못다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 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

책등의 내재율/ 엄세원

책등의 내재율/엄세원 까치발로 서서 책 빼내다가 몇 권이 기우뚱 쏟아졌다 중력도 소통이라고 엎어진 책등이 시선을 붙들고 있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햇살이 배슥이 꽂혀와 반짝인다 정적을 가늠하며 되비추는 만화경 같은 긴 여운 잠시, 일긋일긋 흔들린다 벽장에 가득 꽃힌 책 제목 어딘가에 나의 감정도 배정되었을까 곁눈질하다 빠져들었던 문장을 생각한다 감각이거나 쾌락이거나 그날 기분에 따라 수십 번 읽어도 알 수 없는 나라는 책 한권 이 오후에 봉인된 것인지 추스르는 페이지마다 서려 있다 벽 한면을 온통 차지한 책등의 숨소리를 듣는다 안쪽의 서늘한 밀착을 느낀다 표지가 서로의 경계에서 샐기죽 기울 때 몸 안의 단어들이 압사되는 상상, 책 갈피 속 한 송이 압화 같은 나는 허름하고 시린 과거이거나 목록이다 나는 쏟..

서천(西天)으로 / 최정례

서천으로 1 서천(西天)으로 냇갈에 고기 잡으러 갔다 솜 방맹이 석유 묻혀 깊은 밤 검은 내 불 밝히면 붕어들 눈 멀거니 뜨고 가만 있었다 흐르는 냇갈 안고 자고 있었다 밑 빠진 양철통 갖다 대도 아직 세상 흐르는 줄 알고 가만 있었다 우리 언니 죽을 때 꼭 그랬다 착한 눈 멀거니 뜨고 입 벌린 채 서천으로 2 혼자 우는 새가 있었고 빈 자리가 혼자 비어 있었고 조금 비껴 서서 꽃이 피었고 괜찮아 괜찮아 앉은뱅이꽃들 쓸어안았고 돌아 앉은 얼굴들 바람에 터졌고 내 마음에 영 어긋난 길을 떠났고 * * * 최정례 시인 66세로 영면에 드셨습니다. 창작이란 거, 특히 시를 쓰는 일 사람이 할 수 있는 정신영역 최고의 결과물이자(승화(昇華)) 영혼이 얼마나 힘들게 몰아 부쳐야 하는 일인지 조금은 압니다 '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