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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꾼/김희준

사기(史記)꾼/ 김희준 팔지 않겠습니다 은퇴한 별이 너머에서 잠들고 몇 세기 밤이 광물로 굳어 졌다네 이런 밤엔 무엇도 되고 싶지 않네 먹에 끼인 구름을 피해서 계절은 도래하더군 벼루를껍질 삼았다는 말일세 적 어도 글 같은 모양새로 걷지 않겠나 발가락으로 글이 써진 다면 그까짓 변신이 두렵겠나 토막 난 성기는 폐허와 같아 거세된 문장이 동굴을 밝히 면 나는 어둠이 된다네 어둠은 그대로 검정이어서 어떤 걸 넣어도 좋다네 캄캄하게 물드는 것이 손 뿐이겠나 헤집은 곳 마다 내가 튀어나오더군 가끔은 피카이아가 잡히기도 했지 그럴 땐 그것이 고전적 유물론자인지 고대의 투명한 저녁인 지 알길이 없었다네 아무렴, 나는 팔지 않을 작정이네 동굴에는 척추로 생을 쓰는 내가 있었을 뿐이네 실존을 부끄러워하는 까닭은 어둠 ..

수선화/ 박성현

수선화/ 박성현 수선화가 피었다 발가 벗은 백발이 끓어 올랐다 옛날의 저녁이 다녀갔다 옛날의 저녁은 바스락거리며 혼자 기웃거 렸다 손가락을 움켜쥘 때마다 우산이 물컹거렸다 수선화가 피었다 눈을 활짝 열고 창틀에 고인 빗방울과 그늘을 지 켜 봤다 여름이 가고 또 다른 여름이 갔다 짧은 엽서도 없는 계절이었다 라디오는 식은 밥처럼 차가웠다 저 플라스틱 상자는 언제 쯤 노래를 흥얼거릴까 오래동안 당신이 앉아 있던 자리가 희고 간결했다 희고 간결해서 아주 멀었다 나 는 내 발목을 움켜쥐었던 빗방울과 그늘을 뒤척였다 다시 수선화가 피었다 옛날의 저녁이 기척도 없이 다녀 갔다 - " 내가 먼저 빙화가 되겠습니다"

울음의 안감/정선희

울음의 안감/ 정선희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설익어 목소리가 갈라지는 울음이 있고, 색을 덧발라 속이 안 보이는 울음이 있고, 물기가 가득해서 수채화처 럼 번지는 울음이 있다는 것을 어른이 우는 모습을 본 아이는 속으로 자란다 그날 호주머니의 구멍 난 안감처럼 울음을 움켜 쥔 손아귀에서 허무하다는 걸 알아버린다 그 후 내가 만난 모든 울음은 그날 밤에 바느질된 듯 흐느끼며 이어져 있다 실밥을 당기면 주르륵 쏟아질 그날의 목록들 외할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다섯 여자가 모여 앉아 울음 같은 모닥불에 사연 하나씩 쬐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모두에게 다른 사람, 몰랐던 사람이었다 관계란 아름답지 않은 한 줄 문장 같은 것을 붙잡고 있는 것 울음은 죽은이에게 가지 않고 자신을 적신다 얼룩질 텐데 죽음을 당겨 울음의 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