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1052

안도현 겨울 강가에서 외 네편

안도현 1. 겨울강가에서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 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내리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울가에서 송사리떼에게 거슬러 오르는 일을 가르치려고 시냇물은 스스로 저의 폭을 좁히고 자갈을 깔아 여울을 만들었네 송사리 송사리들 귀를 밝게 하려고 여울목에 세찬 물소리도 걸어놓았네 시냇물의 힘줄을 팽팽하게 당기며 송사리는 송사리는 거슬러 오르고 그때 시냇물이 감추어 둔 손가락지 하나가 물 속에서 반..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 외 2편

나희덕 편 사라진 손바닥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 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년 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꽂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풍장의 습관 방에 마른 열매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책상위의 석류와 탱자는 돌보다 딱딱해졌다. 향기..

윤동주 삶과죽음외 3편

삶과 죽음/윤동주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 사람은 뼈를 녹여 내리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 가기전 이 노래 끝의 공포를 생각 할 사이가 없었다 (나는 이것만을 알았다 이 노래의 끝을 맛본 이들은 자기만을 알고 다음 노래의 맛을 알려주지 아니 하였다) 하늘 복판에 알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자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 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자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 위인들! 사랑스런 추억 봄이 오는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차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