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 외 2편

생게사부르 2015. 12. 1. 23:52

나희덕 편

 

사라진 손바닥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 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년 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꽂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풍장의 습관

 

방에 마른 열매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책상위의 석류와 탱자는 돌보다 딱딱해졌다.
향기가 사라지니 이제야 안심이 된다.
그들은 향기를 잃는 대신 영생을 얻었을지
모른다고, 단단한 껍질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려본다.
지난 가을 내머리에 후두둑 떨어져 내리던
도토리들도 종지에 가지런히 담겨 있다.
흔들어 보니 희미한 종소리가 난다.
마른 찔레 열매는 아직 붉다.
싱싱한 꽃이나 열매를 보며
스스로의 습기에 부패 되기 전에
그들을 장사 지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때 이른 풍장의 습관으로 나를 이끌곤 했다.
바람이 잘 드는 양지볕에
향기로운 육신을 거꾸로 매달아
피와 살을 증발 시키지 않고는 안심 할수 없던,
또는 고통의 설탕에 절인 과육을
불위에 올려 놓고 나무주걱으로 휘휘저으며

달아나지 않고는 견딜수 없던 나는

건조증에라도 걸린 것일까

누군가 내게 꽃을 잘 말린다고 말했지만 그건

유목의 피를 잠 재우는 일일 뿐이라고,

오늘 아침 방에 들어서는 순간

후욱 끼치던 마른 꽃 냄새, 그 겹겹의 입술들이,

한번도 젖은 허벅지를 더듬어본 적 없는 입술들이

일제히 나를 위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나비처럼 가벼워진 꽃들 속에서

 

 

땅 속의 꽃

 

 

땅 속에서만 꽃을 피우는 난초가 있다

땅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기 때문에

본 사람이 드물다 한다

가을비에 흙이 갈라진 틈으로 향기를 맡고 찾아 온

흰개미들만이 그 꽃에 들수 있다

빛에 드러나는 순간 말라버리는 난초와

빛을 피해 흙을 파고드는 흰개미,

어두운 결사에도 불구하고 두 몸은 희디희다

 

현상되지 않은 필름처럼 끝내 지상으로 떠오르지 않는

온 몸이 뿌리로만 이루어진

꽃 조차 숨은 뿌리인

 

        <문학과 지성 시인선 291> 사라진 손바닥에서

 

 

 

 

              사진 1. 함양 상림 연밭

 

 

              사진 2.  청산도 풍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