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박노해,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생게사부르 2015. 12. 1. 13:40

박노해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나는 너무 서둘러 여기까지 왔다
여행자가 아닌 심부름꾼처럼

계절 속을 여유로이 걷지도 못하고
의미 있는 순간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만남의 진가를 알아채지도 못한 채

나는 왜 이렇게 삶을 서둘러 왔던가
달려가다 스스로 멈춰서지도 못하고
대지에 나무 한 그루 심지도 못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주어진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던가

나는 너무 빨리 서둘러왔다
나는 삶을 지나쳐 왔다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