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최영미 선운사에서, 시(詩)

생게사부르 2015. 11. 29. 16:25

최영미 1.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 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 할 틈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시(詩)    

 

 

나는 내 시에서

돈 냄새가 나면 좋겠다

 

빳빳한 수표가 아니라 손때 꼬깃한 지폐

청소부 아저씨의 땀에 절은 남방 호주머니로 비치는

깻잎 같은 만원권 한장의 푸르름

나는 내 시에서 간직하면 좋겠다

퇴근길의 뻑적지근한 매연가루, 기름칠한 피로

새벽 1시 병원의 불빛이 새어나오는 시

반지하 연립의 스탠드 켠 한숨처럼

하늘로 오르지도 땅으로 꺼지지도 못해

그래서 그만큼 더 아찔하게 버티고 서 있는

 

하느님, 부처님

썩지도 않을 고상한 이름이 아니라

먼지 날리는 책 갈피가 아니라

지친 몸에서 몸으로 거듭나는

아픈입에서 입으로 깊어지는 노래

절간 뒷간의 면벽한 허무가 아니라

지하철 광고 카피의 한문장으로 똑 떨어지는

슴슴한 고독이 아니라

사람사는 밑구녁 후미진 골목마다

범벅한 사연들 끓어안고 벼리고 달인 시

비평가 하나 녹이진 못해도

늙은 작부 뜨뜻한 눈시울 적셔주는 시

구르고 구르다 어쩌다 당신 발끝에 채이면

쩔렁!하고 가끔씩 울 수 있는

 

나는 내 시가

동전처럼 닳아 질겨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