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1.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 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 할 틈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시(詩)
나는 내 시에서
돈 냄새가 나면 좋겠다
빳빳한 수표가 아니라 손때 꼬깃한 지폐
청소부 아저씨의 땀에 절은 남방 호주머니로 비치는
깻잎 같은 만원권 한장의 푸르름
나는 내 시에서 간직하면 좋겠다
퇴근길의 뻑적지근한 매연가루, 기름칠한 피로
새벽 1시 병원의 불빛이 새어나오는 시
반지하 연립의 스탠드 켠 한숨처럼
하늘로 오르지도 땅으로 꺼지지도 못해
그래서 그만큼 더 아찔하게 버티고 서 있는
하느님, 부처님
썩지도 않을 고상한 이름이 아니라
먼지 날리는 책 갈피가 아니라
지친 몸에서 몸으로 거듭나는
아픈입에서 입으로 깊어지는 노래
절간 뒷간의 면벽한 허무가 아니라
지하철 광고 카피의 한문장으로 똑 떨어지는
슴슴한 고독이 아니라
사람사는 밑구녁 후미진 골목마다
범벅한 사연들 끓어안고 벼리고 달인 시
비평가 하나 녹이진 못해도
늙은 작부 뜨뜻한 눈시울 적셔주는 시
구르고 구르다 어쩌다 당신 발끝에 채이면
쩔렁!하고 가끔씩 울 수 있는
나는 내 시가
동전처럼 닳아 질겨지면 좋겠다.
'시로 여는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동주 삶과죽음외 3편 (0) | 2015.12.01 |
---|---|
김선우,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외 세편 (0) | 2015.12.01 |
박노해,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0) | 2015.12.01 |
정희성 저문강에 삽을 씻고, 얼은강을 건너며 (0) | 2015.11.29 |
김수영1. 폭포,거미,푸른 하늘을 (0) | 2015.1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