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박연준 얼음을 주세요, 화장

생게사부르 2017. 2. 16. 08:26

박연준

 

 

얼음을 주세요

 


 

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을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끈을 묶지도
오렌지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케이크 위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 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들어 갈지도
늙은 봄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내 생리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 몸에 흘러와 머물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하며 몇 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나는 이제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창비. 2007.


 

화장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본다
낯설게 자란 여자가
머리를 기르고, 외출복을 입었다
치열하게 생각하는 이마가 흐르고 있다
나는 저 여자, 꿈틀거리는,
달리면서 괴로워하는 눈을 볼 수가 없다
아물지 않은 오만함을 손에 쥐고
이제 곧, 우습게 늙어갈 저 여자
하품처럼 피어나는 슬픔에, 분을 바르고
이쪽을 바라보는
나는 안다
빨갛게 익어서 곧 터질 것 같은 토마토의 비밀에 대해
너무 익어서 몸에 잡히는 주름에 대해
주르륵, 비어져나오는 비명에 대해
시커멓게 꼬부라진 꼭지의 부끄럼에 대해
알고 있으므로
조용한 숲에 들어가 엉덩이 까고
알 낳고 싶다
오래오래 하늘 보며 그 알, 품고 싶다
창밖엔 이른 봄을 찌르는 목련나무들
애기 고추만하게 돋아난 저 몽우리들
스물일곱 처녀의 허기진 뱃속에서 피어나는
조그만 슬 ─ 픔 ─ 들 

 

 

     

      박연준 :1980. 서울

2004. 중앙신인 문학상 <얼음을 주세요>당선

시집 '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