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숙
분서(焚書)
의심이 점점 늘어간다. 책장을 정리해도 의심은 사라지지 않는
다. 기억도 나지 않는 줄거리. 감정도 먼 흑백사진 몇 장. 그들은 죽
어 여기 없고 오늘의 눈동자는 살아서 그들의 사진을 본다. 창밖으
로 매미 껍질이 바스락거리며 떨어진다. 매미도 한 시절을 불살랐
을 것이다, 그들의 웃음을 , 사진을, 기억도 희미한 페이지를 불사르
기로 한다. 의심들을 불사르기로 한다. 불을 당기자, 기억나지 않는
상징 속에서 수런수런 말소리 들려온다. 의심이 점점 늘어간다. 불
타 오르면서도 의심은 멈추지 않고 재로 쌓인다. 오로지 순간에만
집중하자. 불타오르는 순간만은 완전하다. 하나의 점이 될 때까지.
불 타 오르는 순간만은 순수하다. 하나의 실재가 될 때까지. 책을 불
사른다. 이데아를 불사른다. 죽은 저자들의 사회를 불사른다. 영원
히 죽지 않을 작자들의 난무하는 상상력, 죽은 광기가 저토록 아름
다울수 있을까 불타오르는 순간은 완성된다. 하나의 철학이 될 때
까지. 불타 오르는 순간은 순정하다. 하나의 정치가 될 때까지. 아직
도 할 말이 많은 입술들을 불사른다. 아직도 완성하지 못한 역사들
을 불사른다. 의심은 영영 줄어들지 않는다.
<수요일의 텍스트> 천년의 시작,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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