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진
내가 백석이 되어
나는 갔다
백석이 되어 찔레꽃 꺾어 들고 갔다
간밤에 하얀 까치가 물어다 준 신발을 신고 갔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데 길을 몰라도
찾아갈 수 있다는 신비한 신발을 신고 갔다
성북동 언덕길을 지나
길상사 넓은 마당 느티나무 아래서
젊은 여인들은 날 알아채지 못하고
차를 마시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치는 내가 온다고 반기며 자야에게 달려갔고
나는 극락전 마당 모래를 밟으며 갔다
눈 오는 날 재로 뿌려달라던 흰 유언을 밟고 갔다
참나무 밑에서 달을 보던 자야가 나를 반겼다
느티나무 밑은 대낮인데
참나무 밑은 우리 둘만의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
죽어서 만나는 설움이 무슨 기쁨이냐고 울었다
한참을 울다 보니
그것은 장발이 그려놓고 간 그녀의 스무살 때 치마였다
나는 찔레꽃을 그녀의 치마에 내려놓고 울었다
죽어서도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말을 못했다
찾아 오라던 그녀의 집을 죽은 뒤에 찾아와서도
말을 못했다
찔레꽃 향기처럼 속이 타들어 갔다는 말을 못했다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백석과 자야)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3년 동안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를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던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 1000억의 재산을 내 놓고 후회하지 않으세요?
- '무슨후회?'
- 그 사람 생각을 언제 하셨나요?
-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천금을 내 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기자는또 한번 어리둥절 했다
- 다시 태어 나신다면?
- '어디서? 한국에서?
- 예!
-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 문학 할거야
-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해
다시 태어 난다면 나도 시 쓸거야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 데는 시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 * *
자야子夜라는 이름은 이백의 시 '子夜吳歌'라는 시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전장에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을 그린 시에서 나온 시어입니다
子夜 김영한(1915~1999)의 기명은 진향眞香이며
한때 요정을 운영하던 자야는 여인들의 웃음과 눈물이 서린 그 곳을 법정스님에게 기부하여
범종소리 맑고 향기롭게 울려 퍼지는 길상사吉상寺 라는 절로 바뀌었으며
땅 기부와 더불어 현금 2억을 내 놓음으로서 ' 백석 문학상 기금'이 마련되었습니다
어려운 형편때문에 기생이 되었지만 시서화에 능하고
일본 유학까지 할 정도로 재능이 있던 여성인 모양입니다
백석은 만주로 간 후 남북이 분단 된 상황에서 1960년대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가
1996년에 돌아가셨고 자야는 1998년 돌아가셨습니다.
백석 주변에 등장하는 여성이 많아서 시에 나오는 나타샤가 누구인지 시인만이 알겠지만
꼭 누구였대도 상관 없는게 시인만의 특권일 스도 있고...
당대 시인의 이상향이었을 여성상이 꼭 현실에서 존재하란 법도 없고...
진실이 어떠하든 자야여사는 우리가 시인으로 사랑하는 남성이지만
자야여사로서는 자신만의 특별한 연인이었으니...그게 중요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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