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진은영-우리는 매일매일, 물속에서

생게사부르 2016. 9. 16. 02:10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흰 셔츠 윗주머니에
버찌를 가득 넣고
우리는 매일 넘어졌지

높이 던진 푸른 토마토
오후 다섯시의 공중에서 붉게 익어
흘러 내린다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열쇠 잃은 흑단상자 속 어둠을 흔든다

우리의 사계절
시큼하게 잘린 네조각 오렌지
터지는 향기의 파이프 길게 빨며 우리는 매일매일


시집 <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 지성사,2008


물속에서


가만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내가 모른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들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나는 잠시 떨고 있을 뿐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 일
물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푸르던 것들이 흘러 와서 다시 푸르른 것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투명해져 나를 비출 뿐
물의 색은 바뀌지 않는 일

(그런일이 너무 춥고 지루 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생각 해 볼까?)

모르는 일들이 흘러 와서 조금씩 젖어 드는 일
내 안의 딱딱한 활자들이 젖어가며 점점 부드러워지게
접점 부풀어 오르게
잠이 잠처럼 풀리고
집이 집만큼 커지고 바다가 바다처럼 깊어지는 일
내가 모르는 일들이 흘러 와서
내 안의 붉은 물감 풀어 놓고 흘러 가는 일
그 물빛에 나도 잠시 따스해지는

그런 상상 속에서 물속에 잊는 걸 잠시 잊어버리는 일


2000. <문학과 사회> 등단
시집: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 ' 우리는 매일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