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영
시곗바늘
삽 세자루가 누군가의 얼굴을 파내고 있다
사라지는 시간의 작은 외침이 재깍재깍 들린다
눈썹을 밀고, 눈알을 파내고, 코와 입을 지웠다
한 바퀴 돌고 돌아와 지운 얼굴을 또다시 지운다
삽은 또 구덩이를 판 후 물컹한 것들을 파묻기 시작한다
사라지는 시간의 작은 외침이 퍽퍽퍽퍽 들린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저 둥근 얼굴을 누가
자꾸 파내고 있는가
피 한방울 없이 깨끗하게 해치우는 놀라운 솜씨
사랑을 밀고, 증오를 밀고, 이별과 공포를 지운다
잘 들어보시라
당신의 얼굴을 삽 세자루가 돌아가며 파내고 있다
그는 매장과 발굴의 전문가가 틀림없다
- 시집<좋은 구름>실천문학사
1968. 경남고성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좋은 구름' 2014. 실천문학사
* * *
재미 있는 시예요. 둥근 시계모양을 둥근 사람의 얼굴이라고 보았군요.
두말할 것도 없이 '삽 세자루'는 초침 분침 시침이지요.
'눈썹을 밀고, 눈알을 파내고, 코와 입을 지'운 건 이 '삽 세자루'의 실수이자 노력(솜씨)이었네요.
시인은 그들을 '매장과 발굴의 전문가'로 보았어요. 시계는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둥근 얼굴'이지만,
삽 세자루를 들고 '매장과 발굴'을 거듭한 시간은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 한 인간의 삶을
완성해 주어요.
결국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시간(세월)'이 '사랑을 밀고, 증오를 밀고, 이별과 공포를 지운다'는 이야기
이른바 세월이 약이라는 거지요. 사는 건 고통이고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랑도 증오도 이별과
공포도 다 세월(시간)이 가면 낫는다는 이야기.
- 유홍준 (시인)
'시로 여는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명관 솔지재 가는 길 (0) | 2016.09.17 |
---|---|
진은영-우리는 매일매일, 물속에서 (0) | 2016.09.16 |
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 마당 앞 맑은 새암 (0) | 2016.09.13 |
황지우 두고 온 것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0) | 2016.09.12 |
김숙영 별일없지... 김시천 안부 (0) | 2016.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