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의 어린 사제/ 박노해
폭설이 쏟아져 내리는 이스탄불 밤거리에서
커다란 구두통을 멘 아이를 만났다
야곱은 집도 나라도 말글도 빼앗긴 채
하카리에서 강제 이주당한 쿠르드 소년이었다
오늘은 눈 때문에 일도 공치고 밥도 굶었다며
진눈깨비 쏟아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작은 어깨를 으쓱한다
나는 선 채로 젖은 구두를 닦은 뒤
뭐가 젤 먹고 싶냐고 물었다
야곱은 전구알같이 커진 눈으로
한참을 쳐다보더니 빅맥, 빅맥이요!
눈부신 맥도날드 유리창을 가리킨다
학교도 못가고 날마다 이 거리를 헤매면서
유리창 밖에서 얼마나 빅맥이 먹고 싶었을까
나는 처음으로 맥도널드 자동문 안으로 들어섰다
야곱은 커다란 햄버거를 굶주린 사자 새끼처럼
덥석 물어 삼키다 말고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면 담배를 물었다
세입쯤 먹었을까
야곱은 남은 햄버거를 슬쩍 감추더니
다 먹었다며 그만 나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창 밖에는 흰 눈을 머리에 쓴
대여섯 살 소녀와 아이들이 유리에 바짝 붙어
뚫어져라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야곱은 앞으로 만날 때마다
아홉 번 공짜로 구두를 닦아주겠다며
까만 새끼손가락을 걸며 환하게 웃더니
아이들을 데리고 길 건너 골목길로 뛰어들어갔다
아, 나는 그만 보고 말았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몰래 남긴 햄버거를
손으로 떼어 어린 동생들에게
한입 한입 넣어 주는 야곱의 모습을
이스탄불의 풍요와 여행자들의 낭만이 흐르는
눈 내리는 까페 거리의 어둑한 뒷골목에서
나라 뺏긴 쿠르드의 눈물과 가난과
의지와 희망을 영성체처럼
한입 한입 떼어 지성스레 넣어주는
쿠르드의 어린 사제 야곱의 모습을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느린 걸음, 2010)
* * *
유례가 없던 2020년 마지막 날입니다.
빨리 쫓아 보내고 싶은 한해네요
이 시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담과 함께 이미 한번 올렸는데
연말이 되면 자주 생각나는 시 입니다.
햄버거 하나, 따뜻한 국밥 한 그릇으로도 산타가 될 수 있는...
저 정도는 특별히 부자가 아니어도 일상에서 얼마든지 만나게 되는 상황이고
' 따뜻한 마음'을 따라 행동도 가능합니다만
한 번씩 ' 부자였으면 참 좋겠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공무원이셔서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 집이었습니다
식구는 많고... 빠듯해서 자연스레 검소하게 자랐지요.
노는 일을 잘 못하고 공부하고 책 읽고...
저 역시 월급 받는 생활로 시작한 사회생활
먹고살고 아이들 공부시키고 기본적인 생활은 유지가 되어서 그랬는지
부자가 되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
고만고만 지내는데...
어떤 상황에서 ' 이럴 때는 내가 부자였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올해도 몇 번 그런 일이 있었네요.
초창기 전교조 교사로 해직되어 끝내 복직되지 못하고
폐휴지를 주어 생활하시던 분이 큰아들은 일찍 잃고 사모님과 함께 병이 들어 입원을 하셨는데
형편이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지인이 모금을 한다는 소식을 보내왔을 때
( 후원금으로 일부 빚을 갚았다는 얘기... 빈익빈의 순환이 참담합니다)
부인이 루푸스병으로 장기간 입원을 했는데 자식도 없고 병구완을 해야 해서 일하러 가지도
못 하는 형편을 전하며 후원 협조를 부탁해 온 초등 동창,,
그야말로 고만고만한 사람들의 십시일반이라 모금액도 '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는 정도' 지
별 도움이 못 되는 금액 들일 텐데...
SNS에 ' 마음이 따뜻한 얘기' 라며 떠돌아다닌 얘기들 중에
더 이상 살아갈 의미를 못 찾을 정도로 절망하고 상심해 있는데
우연히 '귀인'을 만나 도움을 받고 힘을 얻었다는 얘기
힘을 얻을 만한 ' 정신적인' 도움도 있지만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했다든가, 가족 병원비라든가...
정말 절실하게 원하는 경제적 어려움 앞에서 숨통을 틔워줬다는 ' 멋진 부자' 들
그런 부자라면 한번 되어봐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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